01

<휘지>

by 송건자

휘지는 백지 위로 붓을 살포시 내리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한 획 그리고 또 한 획. 신중하고 거침없다. 몇 개의 선이 맞물리고 엇갈리니 글자가 탄생한다. 먹이 마를 틈도 없이 공백이 글자를 덮었다.


순수도 검사 완료 ……… 통과.


휘지가 쓰지 않은 글자가 공백을 가로질렀다. 이내 글자가 사라지고 공백은 희미한 빛을 내며 다섯 방향으로 각기 다른 길이로 찢어졌다. 휘지는 붓을 내려놓고 두루마기를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머리와 팔, 다리를 모양에 맞춰 누웠다. 바닥에 깔린 빛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모였다. 한데 모인 빛이 휘지를 강렬하게 내리쬐었고 빛 사이로 기다란 그림자가 늘어졌다. 집유령거미를 닮은 기계 팔이 휘지의 이곳저곳을 더듬고는 몸체에서 팔과 다리를 떼어냈고 툭 잘린 몸체 안으로 들어갔다. 휘지는 눈을 감았다.


옅은 어둠 속 잔광이 흩어지고 네모난 빛이 돋아났다. 얼마 전부터 휘지의 머릿속을 헤집는 노이즈였다. 휘지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찢어버리든 태워 버리든 저것을 없애야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휘지는 닿을 듯 닿을 듯 닿을 수 없었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그것에 닿을 순간, 삐— 완료음이 휘지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끝났어. 일어나.”


옥Ok이 누워있는 휘지의 발바닥을 툭 찼다.


휘지는 가만가만 눈을 떴다. 강렬히 내리쬐던 빛과 몸체를 주무르던 기계 팔은 보이지 않았고 팔과 다리는 몸체에 붙어있었다. 휘지는 상체를 세우고 앉아 손을 쥐었다 폈다.


“준비할 게 많아. 서둘러.”


휘지가 대답하기 전에 옥은 검사실을 나갔다. 휘지는 널브러진 두루마기를 주웠다.


*


5톤 트럭 두 대를 앞뒤로 이어 붙인 만큼 떨어진 곳에 금속 조형물이 있었다. 금속 조형물은 아파트 3층 높이에 너비는 중형차 세 대를 붙인 것만 했고 고리 던지기처럼 직각 축을 중심으로 크레인 암이 납작하게 끼워져 있었다. 크레인 암 끝에는 철근이 털실처럼 돌돌 말려 있었는데 그 덩어리는 성인이 까치발을 들어야 끝에 겨우 닿을 수 있을 수 있었다.


옥은 휘지와 눈빛을 교환하고 턱으로 금속 조형물을 가리켰다. 휘지가 금속 조형물에 신경을 내뻗자 하중 보조 실린더가 압축 공기를 내뿜었다. 휘지는 팔꿈치가 저렸다. 연결 징후였다. 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휘지와 눈을 맞추었다. 움직여 봐. 크레인 암이 바닥에서 살짝 떠올라 폴딩 나이프처럼 수납된 팔을 구부정하게 폈다. 그대로 펴기엔 공간이 부족했다. 휘지는 크레인 암을 직각으로 세우고 구부러진 곳 없이 마저 폈다. 프레임 사이에 숨겨진 하중 보조 실린더가 스포트라이트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반짝였다. 구경꾼들은 살아있는 브라키오사우루스라도 본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옥이 광장을 가리키자 휘지는 사람들 키보다 높이 크레인 암을 들었다. 어깨 축을 중심으로 크레인 암이 회전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크레인 암만 보며 쫓는 관계자들에게 옥이 소리쳤다.


휘지는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철근으로 엮은 손가락을 활짝 펴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보조 실린더가 차례차례 압축 공기를 뿜었다.


“올 그린?”


옥이 물었다. 태블릿은 초록색 게이지 바와 글자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시스템상 상태와 실제 사용감이 다른 경우가 있다. 휘지는 거인의 손목을 두세 번 돌리고는 검지와 엄지 끝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저쪽에 붓도 있어.”


옥이 광장 구석을 가리켰다.


대나무 붓이었다. 유전자 조작을 가했다고 하나 이만큼 키우려면 들어가는 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붓대는 옻칠을 해서 색이 검었고 끝에는 고동색 털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것이 바람 속을 질주하는 조랑말 갈기 같았다.


휘지는 철근 손가락으로 조랑말 붓을 들었다. 누워있을 땐 몰랐는데 세로로 세우니 그 크기가 상당했다. 하지만 그 크기도 거인이 쥐고 있으니 알맞았다. 휘지는 조랑말 붓을 쥐고 가볍게 좌우로 움직였다. 무게도 적당하다. 휘지가 두루마기 소매를 걷어 올리자 옥은 슬금슬금 광장으로 침범하는 관중을 뒤로 물렸다. 휘지가 직각으로 오른팔을 들자 시차 없이 크레인 암도 자세를 취했다. 휘지가 허공에 선을 긋자 크레인 암도 따라 선을 그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옥은 이만하면 됐다며 손날로 목을 그었다. 휘지는 원래 있던 곳에 붓을 두었고 크레인 암도 금속 조형물로 되돌렸다.


“이 정도로 움직이면 될까요?”


휘지는 생기를 잃은 금속 조형물을 돌아보았다.


“장비 담당이랑 얘기했는데 이 정도 속도면 괜찮대. 지금보다 빨라지면 실린더에 걸리는 부담이 커지니까 그것만 주의해.”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역동적이라 보는 재미가 있을 텐데요. 이보다 느리면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요?”


광장을 둘러보던 옥이 갑자기 한숨을 푹 쉬더니 이제는 말하기도 지겹다는 눈으로 휘지를 바라보았다.


“너는 플랜대로 공연이나 하면 돼. 입 아프게 똑같은 말하게 하지 마.”


휘지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리허설이 끝났다. 휘지는 대기실로 향했고 옥은 소품과 무대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남았다. 휘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써야 할 단어를 떠올렸다. 永世不忘 地球保護(영세불망 지구보호). 특히 ‘護’는 획이 많아 쓸 공간을 염두에 둬야 한다. 획수가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쓰는 속도가 빨라지고 자칫 크레인 암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부러지는 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휘지는 즉각 몸체와 의식이 해체되고 퍼포먼스는 망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옥도 있고 안전감시 프로그램도 심어져 있다.


휘지는 공연용 붓을 들었다. 허공에 정신없이 맨손을 휘적이면 꼴이 우스우니 준비한 보여주기용 붓이다.


휘지는 두루마기 소매를 걷고 오른팔을 직각으로 세웠다. 서예는 팔 전체로 써야 올곧고 아름다운 글자가 나온다. 휘지는 먹을 묻히지 않은 붓을 바닥에 대었다. 연습하지 않아도 휘지는 어느 글자든 원하는 서체로 완벽하게 쓸 수 있지만 단어가 주어지지 않으면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휘지는 단어가 주어진 이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열한 번째 연습에 돌입할 즘이었다. 문이 열리고 옥이 들어왔다. 옥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꼭 직전에 바꾸자는 인간들이 있어.”


휘지는 글자를 마저 쓰고 옥을 바라보았다. 울그락불그락했다.


“준비 시간 부족해서 당일 변경은 안 된다고. 메일 보낼 때마다 확인하고 리허설 때도 몇 번이나 알려줬잖아. 어제는 변경 없다고 아주 좋다고 실실거렸면서 이제 와서 안 되겠냐고. 휘지, 한글은 다운로드 안 했지?”


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은 데이터베이스가 오염될 소지를 우려해 투어 플랜에 따라 휘지가 쓸 수 있는 문자를 한정한다. 이번 투어는 한자 번체만 쓰기로 했다.


“하여간 인간들. 장인이라면 다르지 않을까요? 굽신굽신. 다르긴 뭘 달라. 더 까다롭지. 내가 전통문화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내 입만 아프지. 아, 휘지. 어깨 축 살짝 틀어져있더라. 몰랐어?”


휘지는 고개를 저었다.


“인마, 네가 알아야지 누가 알아. 발견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어. 여분 한지도 없대. 장인 나리가 하는 거니 실수는 없겠지만 알아둬. 옷은 저거로 갈아입고.”


옥은 대기실 한편에 놓인 행거를 가리켰다. 주름 하나 없는 밤색 두루마기가 걸려 있었다.


“지금 입은 옷도 저들이 보낸 옷이잖아요.”


휘지는 고개를 숙여 입고 있는 두루마기를 내려보았다. 어두운 감색이었다. 클라이언트는 자연 염색 공법과 신기술, 신소재를 섞어 만든 탄소중립적인 소재로 만들었다며 올해 주력으로 밀 계획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반드시 입고 와야 한다고 당부에 당부를 더하면서 일정이 확정되자마자 두루마기를 보냈다.


“낸들 알겠어. 이번 시즌에 미는 색깔을 바꿨나 보지.”


“나는 마네킹이군요.”


하하하. 옥은 별안간 크게 소리 내어 웃더니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짜증 가득한 얼굴을 휘지에게 들이밀었다. 옥은 휘지의 머리를 콩콩 두드렸다.


“프로그램 돌아가고 있지? 뭐 건드린 거 아니야?”


“건드리지 않았어요. 건드릴 수도 없고요.”


“그러면 휘지야, 나 좀 살려줘. 나 벌써 일흔넷이야. 아무리 평균 수명이 백오십이고 노화 정지 시술받았어도 별거 아닌 일로 피곤하게 만들지 말자. 응?”


“네.”


“제발 부탁 좀 할게. 내가 예전처럼 사납게 굴기를 하니.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기를 하니. 우리 하던 대로 서로 도우면서 넘어가자. 응? 그동안 우리 손발 잘 맞았잖아.”


“네, 알겠습니다.”


“말로만 네, 네 하지 말고. 다른 거 안 바라. 너는 순수도만 지켜. 투어 중에 무너지면 나도 어떻게 못 해주니까. 응?”


휘지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옥은 휘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옥은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들썩였다. 한결 표정이 편안해진 옥은 반쯤 감은 눈으로 휘지를 보았다. 긴 머리는 하나로 묶어 정갈했고 얼굴은 매끈하고 깨끗했다. 무릎을 꿇은 자세는 곧고 단단했다. 궂은일에도 절대 부러지지 않을 소나무 같았다. 휘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고 손은 공연용 붓을 들고 있었다.


“대체 연습하는 흉내는 왜 내는 거야? 연습 따위 안 해도 완벽하게 쓰실 수 있잖아.”


“연습 없는 완벽은 없습니다.”


옥은 기가 찬 듯 허탈하게 웃었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 같네.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하긴 안드로이드가 뭘 알겠냐.”


옥은 품에 안은 태블릿을 건드렸다.


“아휴, 십 분만 자야겠다.”


옥은 밀려드는 피로에 파묻혀 금세 코를 골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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