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지>
*
“지구를 살리는 일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일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이었습니까. 숲을 파괴하고 바다를 더럽혔죠. 그뿐입니까? 이름 모를 동물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요? 아닙니다. 편하려고 한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숨통을 조인 겁니다. 어떻게 키웠는지도 모를 음식을 먹고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옷을 입고! 생각 없이 흘러가는 행동에 의문을 가지고 멈춰본 적이 있으십니까? 단 한 번이라도요. 그런 적이 없다면 여러분도 공범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요!”
진행자가 손가락을 세워 관객석을 찔렀다. 관객석에서 박수와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그간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 수십 년간! 이제 그 결과가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잊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전과 성질이 다른 아우성이 쏟아졌다. 진행요원이 슬며시 휘지에게 다가왔다. 그는 무대 쪽을 바라보며 한쪽 귀에 손을 갖다 대고 무전에 집중했다.
“지금부터 장인 님을 모시고 저희의 염원을 기원합시다!”
함성이 쏟아졌다. 진행요원의 눈썹이 요동치더니 귀에 갖다 댄 손을 재빨리 무대로 뻗었다. 휘지는 밤색 두루마기를 여미고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무대 조명이 닿지 않아 어두웠다. 신경을 마비시킬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휘지는 옅은 어둠이 자신과 세상을 분절했다고 느꼈다. 무대로 이어지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니 진행요원도 보이지 않았다. 휘지는 우두커니 섰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로 사라져? 휘지는 한 곳을 떠올렸지만 서둘러 그것을 지웠다.
휘지. 휘지.
멀리서 함성이 들렸다. 그제야 바닥에 붙인 유도등이 눈에 들어왔다.
나아갈수록 함성이 점점 커졌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스포트라이트가 휘지 곳곳에 붙은 어둠을 걷어냈다. 무대로 나가니 더욱더 큰 환호성이 휘지를 반겼다. ‘휘지’를 연호하는 사람도 있었고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휘지가 위치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자 호응을 끌어내던 진행자가 휘지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장인 님. 안녕하세요. 여기 계신 분들께 인사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서예 장인, 휘지입니다.”
진행자는 더 할 말이 없냐며 장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휘지는 앞만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장인 님, 오늘 멋진 옷을 입고 오셨는데요. 여러분, 어떠세요? 좋아 보이죠. 저희가 이번 시즌 여러분께 선보일 새로운 소재로 만든 옷이랍니다. 당장 내일부터 매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으신데요. 장인 님이 입고 계신 두루마기처럼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옷을 제작할 수도 있고 저희 이에코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옷을 만나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전에.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께 특별한 선물을 드려야죠. 제가 입고 있는 재킷, 이쁘죠? 장인 님의 퍼포먼스가 끝나면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이 신상 재킷을 드리겠습니다! 공연이 끝나더라도 자리를 꼭 지켜주세요. 아셨죠?”
환호성이 들끓었다.
“자, 그럼 이제 장인 님의 퍼포먼스를 만나봐야겠죠? 장인 님. 오늘 저희에게 보여주실 퍼포먼스가 뭔가요?”
“저는 제게 주어진 것을 보여드릴 뿐입니다.”
진행자가 까닭 없이 웃었다. 객석도 마찬가지였다. 휘지는 웃지 않았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겠군요. 장인 님, 주어진 것! 마음껏 보여주세요!”
진행자가 광장을 향해 손을 뻗자 조명이 광장으로 쏟아졌다.
광장은 한지로 뒤덮여 있었다. 100미터 트랙 다섯 줄을 덮고도 족히 남을 크기였다. 순식간에 하얘진 광장에 관객들이 감탄을 쏟아내는 사이, 휘지는 돌출 무대로 이동했다. 사전에 정한 위치에 서자 핀 조명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휘지는 무릎을 꿇고 크레인 암에 신경을 연결했다.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무대 뒤편에 설치한 스크린이 휘지를 비췄다. 휘지가 소매를 걷고 팔을 들자 어깨 축을 따라 크레인 암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환호성이 한 층 더 높고 커졌다. 시끄러웠다. 휘지는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갔다. 무대 스크린 속 휘지의 입술에 철근 검지가 겹쳤다. 환호성이 메아리처럼 잦아들었고 공연장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철근 손가락이 조랑말 붓을 쥐었다. 객석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휘지는 벼루에 붓을 담고 먹이 충분히 스밀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시간을 꽤 잡아먹었는데도 관객들은 지루해하지 않았다. 옅은 어둠 속에 파묻힌 그들은 아득히 웃고 있었다.
휘지는 벼루 가장자리에 먹을 덜어내고 광장으로 붓을 옮겼다. 플래시가 터졌다. 휘지는 호흡을 멈추고 호(붓 끝)를 한지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먹이 스몄다. 휘지는 점 아래로 길게 붓을 당겼다. 붓대는 속도를 높이고 줄이며 발밑에 기다란 그림자를 남겼다.
휘지는 한 글자를 마치고 관객석을 보았다. 어둠의 장막에 가려진 무수한 얼굴이 두루뭉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아이의 표정이 도드라졌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문제없지?”
도쿄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문제없어요.”
휘지의 담담한 대답에 옥은 못 미더운 눈으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머리와 사지를 고루 펼친 인체도가 떠올랐다. 올 그린. 순수도 99.8퍼센트. 미심쩍었다.
안드로이드와 사십 년 넘게 함께 지내면 수치가 나타내지 못하는 문제와 가끔 맞닥뜨린다. 설마 그것 때문일까. 옥은 얼마 전 휘지에게 건넸던 편지를 떠올렸다. 처음엔 옥도 망설였었다. 세 달 동안 순수성 검사를 못하고 후속 대처도 못하는데 괜히 자극을 주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옥도 감독관 이전에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 편지는….
옥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철저하게 검사했잖아. 문제없어.
“그러면 어제 텀이 왜 이리 길었어? 하마터면 한 장뿐인 한지를 망칠 뻔했잖아.”
“저도 모르게 긴장했었나 봅니다.”
휘지의 뻔뻔한 얼굴에 옥은 휘지의 앞섶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진짜 옛날 버릇 나오게 할래? 내가 사람답게 대해주니까 찍고 까불어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야? 내가 누누이 말했지. 눈 떠보니 인간이 통달할 수 없는 경지를 밟고 있다고 해서 네가 대단한 게 아니라고. 수천 년 쌓인 데이터를 집대성한 인간이 대단한 거라고. 너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휘지는 옥의 눈을 바라보았다. 좌절한 꿈과 절망한 현실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마주했다.
“아무 노력도 안 해본 네가 뭘 알겠어. 몇 번 끄적이는 걸 ‘노력’이라고 말하는 네가.”
옥은 한동안 휘지를 노려보았고 휘지는 눈을 깔았다. 옥은 경고 하듯 거칠게 앞섶을 놓고 두통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등받이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휘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구름이 눈밭처럼 펼쳐져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