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휘지>

by 송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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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지 와 유리는 서예 도장에서 처음 만났다.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다.


서예 도장은 중앙문화보존기구가 설립하고 장인 안드로이드 휘지와 감독관 옥이 위탁 운영하는 공간이다. 중앙문화보존기구는 아무도 맥을 잇지 않은 세계 전통문화를 통합하고 관리하는 범국가 기구로, 잊히는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취지로 발족했다. AI의 힘을 빌리면 누구나 옛것과 흡사한 결과물을 마음껏 뽑을 수 있지만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서예는 붓을 뗄 때까지의 과정과 획을 그리는 행위자의 태도가 중요한데 이건 결과물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그래서 중앙문화보존기구는 전통문화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안드로이드에 집어넣고 ‘장인’ 감투를 씌웠다.


전통문화마다 무조건 ‘장인’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중앙문화보존기구 내부 기준에 따라 장인 안드로이드는 생겨나기도 없어지기도 한다. 작년에는 한지 제조 장인 ‘금의’가 폐기되었다. 중앙문화보존기구는 한지 제조가 매력적이지 않으며 수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서예는 전통문화 중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다. 교통수단과 인터넷의 발달로 문화 이해도가 높아지고 극한으로 치달은 지구 환경에 국가 간 경계선이 희미해졌다고 하나 서양에서는 동양권 전통문화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고, 동양에서는 날로 빠르고 정신없이 발달하는 기술을 쫓아 바깥으로 향한 시선을 내부로 돌리고 싶어 했다. 여러모로 서예가 적격이었다.


서예 도장을 찾는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남녀노소 동서양을 막론하고 휘지의 제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꾸준히 도장을 채웠다.


유리의 부모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유리의 부모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도장을 여는 시간부터 닫는 시간까지 종일 서예를 하는가 하면 난관에 부딪치면 스승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구했다.


유리는 그런 부모의 손에 끌려왔다. 부모에게서 뭐든 골고루 물려받은 유리였지만 서예에 대한 흥미만큼은 물려받지 못했다. 부모는 딸에게 몇 번이고 붓을 쥐여주고 무릎을 꿇렸지만 유리는 잔뜩 압축한 용수철처럼 도장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당연했다. 한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먹을 갈고 붓을 적시고 획을 긋는 일은 어른에게도 지루한데 하물며 네 살은 어떻겠는가. 유리의 부모는 딸이 저지른 무례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휘지는 괜찮았다. 무례도 아니었고 누구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을 이유는 없었다. 휘지는 그저 해맑게 마당을 뛰노는 유리를 보며 부모가 시킨다고 무작정 하지 않은 당찬 모습이 멋졌고 부러웠다.


월드 투어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우기雨期의 끝자락에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휘지는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오른팔 피부 덮개를 열었다. 안전감시 프로그램 설치 때문에 개완開腕한 부분에 이물감이 남아있었다. 휘지는 드라이버로 횡축을 조정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그쳤어야 했을 비가 더욱 때려부었다.


일기예보가 점점 맞지 않았다. 휘지는 이대로 투어가 취소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걱정… 걱정은 아니었다. 다만 도장을 쉬는 게 아쉬웠다. 제자들과의 만남은 휘지의 소소한 낙이었다. 자유롭게 획을 긋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바로 잡아주고 싶다가도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서예라고 보았다. 누군가 정한 글자와 서체가 아니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자를 마음대로 쓰는 것이. 휘지는 드라이버를 내러놓고 피부 덮개를 빈틈없이 닫았다.


쿵쿵. 잔뜩 습기를 머금은 나무 대문이 둔중한 소릴 내었다. 옥일까. 투어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본부가 있는 파리에 간 참이었다. 어제 돌아왔어야 했지만 이런 날씨에는 호버 카도 뜨기 어렵다. 그래도 옥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휘지를 담당한 지 십 년이 다 되었지만 옥은 휘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안드로이드가 멋대로 데이터베이스를, 서예를 더럽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마음 같아선 휘지를 파리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월드 투어로 오랫동안 도장을 닫으니 누군가는 도장에서 제자들을 맞이해야 했다. 비가 이렇게 올 줄 알았다면 억지를 부렸겠지만 하늘에 구멍이 난 건 옥이 떠난 날 밤부터였다.


쿵. 다시 소리가 들렸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소리가 온갖 소리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니 엔진 소리를 못 들은 걸지도 모른다. 휘지는 두루마기를 여미며 마루에서 일어났다.


현관 CCTV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설마 하니 장난은 아닐 것이다. 서예 도장은 시티에서 꽤 떨어져 있고 이곳까지 오는 버스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무리해서 비바람을 뚫고 오느라 지쳐 쓰러졌을까. 휘지는 희박한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현관으로 나갔다. 누군가 대문 기둥에 기대 쭈그려 앉아있었다. 몸집으로 봐서 옥은 아니었다.


“누구시죠?”


이방인이 힘겹게 얼굴을 들었다.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기둥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휘지는 아이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 가까스로 잡았다.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아이의 정체가 아니었다. 아이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선 빗물에 탱탱 불어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녹이 슬어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휘지는 두루마기를 벗어 아이를 감쌌다.


휘지는 도장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휘지에게 주어진 유일한 공간이다. 휘지는 옷장에서 가지런히 정돈된 형형색색의 두루마기를 꺼내 벌벌 떨고 있는 손님을 덮어주었다. 담요가 있으면 좋겠지만 사용할 사람이 없으니 두지 않았다. 휘지는 히터를 틀었다. 겨울 이후로 사용하지 않은 탓에 휘휘한 바람만 새어 나왔다. 아이는 두루마기를 움켜쥐어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아이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휘지는 소녀를 꼭 껴안았다.


세찬 빗소리와 나지막한 숨소리만 공간에 남았다. 휘지는 비로 젖은 두루마기를 벗기고 새 두루마기로 덮었다. 히터도 적당히 따뜻한 바람을 내보냈다. 휘지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들어 소파에 눕혔다. 두루마기에 폭 싸인 아이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었다. 아이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고 쪼그라든 손끝에도 생기가 돌았다. 휘지는 아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생길까 한동안 아이의 곁을 지켰고 그제야 아이가 누군지 떠올렸다. 오래전 마당을 천방지축 종횡무진하던 아이, 유리였다.


휘지는 유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안방에서 나왔다. 마루로 나온 휘지는 아차 싶었는데 흥건히 젖은 발자국과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마룻바닥에 철길처럼 늘어져 있었다. 휘지는 무릎을 꿇고 그것을 닦았다.


휘지는 말끔해진 도장 한가운데 한지를 마주하고 앉았다. 충분히 먹을 머금은 붓은 언제라도 글자를 쓸 수 있었지만 그것이 나설 차례는 없었다. 휘지에게 주어진 단어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지 앞에 앉아 먹을 갈고 붓을 준비하는 건 휘지가 본디 가지고 태어난 본능이었고 이룰 수 없는 열망이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고 세로로 길게 난 따스한 빛이 마루를 밝혔다. 몸집이 두툼해진 유리가 문설주에 어깨를 기대고 서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늘로 삐죽 솟아있었다.


“일어났어요?”


유리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유리는 또다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설주에서 몸을 떼고 휘지 옆에 살포시 앉았다.


“써볼래요?”


휘지는 유리에게 붓을 건넸다. 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붓을 쥐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휘지는 유리가 편히 쓸 수 있도록 비켜 앉았고 유리는 휘지가 내어준 만큼 움직였다.


유리는 한동안 한지를 내려보더니 붓을 내렸다. 먹이 스몄다. 한지가 거의 뚫릴 즘 유리의 붓이 드디어 움직였다. 왼쪽으로. 위로. 다시 오른쪽으로. 길게 내뻗는가 하면 맥락 없이 둥근 선을 그었다. 유리는 정처 없이 붓을 휘저었다. 유리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은 글자가 아니었다. 어떠한 상징을 품었다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유리에겐 미안하지만 미적으로도 형편없었다. 필압도 엉망이라 붓촉을 수세미처럼 뻗쳤고 먹도 진작 메말라 획을 그을 때마다 무성한 갈대밭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휘지는 유리에게 손을 뻗었지만 도로 거두었다.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고 입술은 그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그 자리를 메우듯 옥이 도착했다. 옥은 안방에 잠들어 있는 유리를 보고 질겁했다. 어린애가 여기에 왜 있냐며 허튼 생각 말라며 휘지의 멱살을 잡아 검사실에 처넣었다. 파리로 떠나기 전, 방화벽을 이중 삼중 겹겹이 세웠지만 옥은 안드로이드를 믿지 못했다.


잠에서 깬 유리는 겁에 질렸고 그런 유리를 휘지는 안심시켰다. 휘지의 무고가 풀리자 총구는 유리에게 향했다. 유리는 휘지의 등뒤로 숨었다. 휘지는 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해야 도와줄 수 있다고 타일렀지만 유리는 묵묵부답이었다. 휘지는 아이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순 없었다.


옥은 오래된 연락처에서 유리의 부모를 찾았다. 그들이 도장에 발길을 끊은 지도 5년이 지났지만 다행히 연락처는 그대로였다. 유리의 부모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도장을 찾았다. 두 사람은 텀을 두고 따로따로 도착했다.


엄마, 아빠와 마주한 유리는 그제야 휘지에게서 떨어졌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 손을 하나씩 나눠 잡고 배시시 웃었다. 부모와 아이는 나란히 서서 한때 스승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젖은 두루마기에 대한 세탁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조아렸다. 옥은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안드로이드가 입는 옷인데요, 라는 뒷말이 생략된 것 같았다. 유리는 나무 대문 앞에서 아빠 손을 잡은 채 휘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휘지는 공손히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6년 뒤, 지긋지긋한 우기가 끝나고 일 년에 손꼽히게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도장은 한가로웠다. 옥은 13년 동안 쌓인 휴가를 더 이상 묵힐 수 없어서 부재중이었고, 도장에는 노인 하나만 붓을 놀리고 있었다. 휘지는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다 할 이벤트도 없어 모처럼 존재 이유를 잊는 나날이 계속되겠구나, 엉뚱한 가정을 그리는 참이었다.


“휘지 님, 안녕하세요.”


누군가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손님은 원래 알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휘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는 자기 몸통보다 큰 캐리어 가방을 낑낑 끌며 문턱을 넘었다.


휘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휘지는 ‘서예’를 제외하면 여타 안드로이드에 비해 부족한 면이 많다. 데이터베이스와 연결하지 않거나 일부 데이터를 다운로드하지 않으면 서예를 제대로 하지 못할뿐더러 ‘장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게 무척 작은 메모리가 심어져 있다. 이마저도 퍼포먼스로 얻은 데이터로 거의 가득 차있다. 휘지가 쌓은 데이터는 데이터베이스로 역류하지 못하도록 방화벽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고, 감독관 허락 없이는 데이터 패킷조차 옮길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방문객은 유리였다. 휘지는 메모리 확보를 위해 주기적으로 메모리를 비우는데 밑바닥에서 유리의 흔적을 찾은 건 행운이었다. 다만 유리의 성장을 예측하고 기억과 매칭하는데 처리 시간이 필요했다. 소녀는 눈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훌쩍 자랐고 동글동글했던 얼굴도 제법 소녀티를 벗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휘지의 눈 크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휘지는 얌전히 기다려준 유리를 뒤늦게 반겼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오늘도 혼자 왔어요? 여기 온 거 부모님도 아시죠?”


“천천히, 천천히요.”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오늘도 저 혼자 왔어요. 비행기 타고 열차 타고 버스 타고요. 걱정 마세요. 부모님도 저 여기 온 거 아세요.”


“다행이군요. 그럼 무슨 일로 왔어요?”


유리는 얼굴 가득 담긴 장난기를 걷어내고 공손히 손을 모았다.


“제자로 받아주세요. 휘지 님.”


유리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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