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지>
*
옥은 짐도 풀지 못하고 중앙문화보존기구 본부로 소환되었다. 투어 자체는 성공이지만 장인 안드로이드를 잃은 것과 장인 데이터베이스를 오염시킨 것에 대한 문책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옥 스스로도 실망이 컸다.
옥은 회의실 문을 열었다. 어두웠다. 전원 스위치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감독관 옥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옥이 용기를 내어 회의실 안으로 발을 뻗었다. 복도에서 들어오는 빛조차 없었다면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옥이 완전히 회의실로 들어가자 문이 스스로 닫혔다. 옥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에 옥은 숨이 막혔다.
“이번 일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옥은 토하듯 말을 뱉었다.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듯 정면에 직사각형 빛이 솟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각각의 라이트 패널light panel에 사람 모양 그림자가 생겼다. 서있는 사람도 있었고, 앉아 있어 상체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역광 때문에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옥은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이 서예 담당 안드로이드 감독관…… 오케이 프레히트?”
가장 왼쪽 첫 번째 패널에서 인공 합성음이 났다. 억양이 없어 개발 초창기 음성합성처럼 들렸다.
“감독 번호 CHM0718 옥 프라이하이트Ok Freiheit 입니다.”
“프라이하이트 감독관. 당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번째 패널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공 합성음이 났다.
“장인 안드로이드 소실과 장인 데이터베이스 오염에 대한 실책입니다.”
하하하하하. 다섯 번째 패널이 게걸스럽게 웃었다. 파열음 섞인 기괴한 웃음소리였다.
“그까짓 것들, 아무래도 좋아.”
옥은 어리둥절해져선 톱질하듯 패널 다섯 개를 도리질했다.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를 잃은 일이나 데이터베이스에 흠집 난 일로 감독관을 호출한 게 아니란 거예요.”
두 번째 패널이 소리를 냈다.
“그깟 안드로이드 하나 순수도 떨어졌다고 원본이 더러워지겠나? 유구하고도 찬란한 인간 문화에 똥물 한 방울 튀었다고?”
다섯 번째 패널이 소리를 냈다. 옥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말씀은 장인을 통제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씀이신가요?”
“통제는 필수예요. 만일의 가능성을 풀어둬선 안 되죠. 만약 AI가 원류를 찾을 수 없게 전부 뒤섞으면 어쩌죠? 인간이 쌓아 올린 시간이 하찮아 보일 만큼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서체를 만들면요. 이제 예술은 전부 AI에게 집어 먹혔잖아요. 회화, 조각, 소설, 만화, 일러스트. 셀 수 없이 많죠.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건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두 번째 패널의 물음에 옥은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니야. 그런 건 공상 토론장에서나 해. 그나저나 가지고 오란 건 가지고 왔나?”
옥은 첫 번째 패널을 향해 태블릿을 들었다.
“거기에 데이터가 들어있나?”
“네, 그렇습니다.”
“자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보았나?”
옥은 고개를 저었다.
“파일 정리한 게 전부입니다. 메모리 회수 때문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 믿지. 자네는 이제 그거 두고 이만 나가게.”
세 번째 패널 앞에 손바닥만 한 타일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옥은 태블릿에서 메모리 칩을 빼내 그것 위에 두었다.
“저,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첫 번째 패널 속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지의 의식… 장인에게 떼낸 메모리는 어디에 쓰실 건가요? 이 메모리가 있어야 장인을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휘지는—그 안드로이드는 꽤나 오랫동안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왔어요. 몇 가지만 손 보면 완벽하게 제 역할을 다시 해낼 겁니다. 제가 더 철저하게 감독하겠습니다.”
“프라이하이트 감독관,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셈이야? 이거 월권이야.”
“정이 진득하게 들었나 보네요. 더더욱 당신이 알 필요는 없겠어요.”
다섯 번째 패널에 잇달아 두 번째 패널이 소리를 내었다.
“담당 감독관이니 말해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47년을 함께 했는데.”
네 번째 패널이었다. 이어서 세 번째 패널이 소리를 냈다.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지 않은 데이터를 토대로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 겁니다. 다음 장인 역할을 맡을 안드로이드의 밑바탕이 될 테죠. 아무리 데이터베이스가 오염될 가능성이 낮아도 이번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될 일이었습니다. 편의와 자연스러움을 구현하기 위해서라지만 애초에 자율 시스템을 심은 게 잘못이었어요. 목줄을 풀어선 안됐습니다. 어쨌든 그간 축척한 데이터로 한동안 쇼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전만큼 새로운 시도를 빠르고 완벽하게 해낼 순 없겠지만 그건 그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렇다고 사고 친 안드로이드를 되살릴 가능성은 없으니 기대는 마십시오.”
“퍼포먼스가 돈이 많이 남는데 말이야. 시드니 건으로 물이 막 밀려들어오는데 이렇게 주춤거려서야. 아, 그래. 당신 월급 깎아도 되지? 깡통 로봇 하나 통제 못한 당신 잘못이잖아.”
옥은 제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만하지. 여기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이후 처분은 나중에 통보할 테니 그만 나가주게.”
다섯 번째 패널의 소리를 첫 번째 패널이 끊었다.
옥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옥은 라이트 패널을 향해 까딱 고개를 숙이고 뒤돌았다. 옥이 미처 회의실을 나가기 전에 패널이 하나씩 꺼졌다. 옥은 잠시 어둠 속을 걸었다.
*
옥은 본부에서 나왔다. 호출한 호버 카를 기다리며 품에 안은 태블릿을 건드렸다. 옥은 복잡한 경로 탐색과 암호 입력을 여러 번 거친 후에 이미지를 화면에 띄웠다.
우그러진 종이 단편 위에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붓을 처음 잡은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삐뚤하고 어떤 글자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한편으론 격자칸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표현하겠다는 달뜬 마음이 한껏 들어가 있었다. 자유로웠고 행복해 보였다.
옥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평양처럼 무척이나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행복해 주세요.
옥은 휘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옥은 아직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림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생겼다. 오랫동안 애써 외면했었던 일이었다. 옥은 검지를 빼들어 하늘에 글자를 써내렸다. 揮之. 보고 싶고 미안한 이름이었다.
옥은 호버 카에 올라 아무도 없는 도장으로 향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붓을 들어볼 참이었다. 혼자 남아서야 간신히 그런 마음이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