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중력이다 : 소설 《첫숨》

문화는 생활양식을, 습관을, 관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by 하선

2017년에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SF 문학의 불모지라고 여겨지는 우리나라지만,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집필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 배명훈의 소설 《첫숨》.


내가 SF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우리 엄마의 취향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 엄마는 대학 시절 과학을 전공했지만 언젠가부터 유화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어 제 2의 삶을 살고 있는 멋진 할머니다. 최근 들어서는 미술 대학원을 다님과 동시에 AI에 눈을 뜨게 되어 웬만한 사회인보다 더 바쁜 삶을 살고 계시다.


이런 엄마의 손에서 자란 내 기억 속 가장 어릴 때 본 영화는 바로 칼 세이건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콘택트 (1997)》. 엄마가 좋아하던 SF 영화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2016년 테드 창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가 영화화되었을 때, 한국어 제목이 《컨택트 (2016)》로 겹치게 되면서 한동안 언짢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순전히 주변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 번거로운 과정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컨택트요. 조디 포스터가 주연했던.", "아, 이번에 나온 거 말고, 97년도 옛날 영화요"). 물론 결국엔 후자의 영화 역시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였지만 말이다.


대략 이렇다 보니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어쩐지 검증된 기분이 드는데, 배명훈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엄마의 추천으로 배명훈의 소설을 처음 접했고, 그 첫 시도가 바로 《첫숨》이다. 어쩌다 보니 기회가 닿아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었던 책인데,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꺼내어 드니 새롭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론 '어차피 이거 본 사람만 읽겠지' 란 마음으로 리뷰를 써 왔는데, 대중적인 영상 콘텐츠보다 마이너 할 수밖에 없는 소설 분야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 오늘은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써보려고 하니, 모쪼록 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더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서점 플랫폼을 통해 알려진 시놉시스는 아래와 같다.

인구 6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우주 정착지 ‘첫숨’.

회전축과의 거리에 따라 중력이 달라지는 공간인 첫숨은 화성인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우주정착지로서 지구 자본, 그중에서도 지구 궤도를 도는 소규모 스페이스콜로니 연합과 오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달에서 추던 춤을 계속하기 위해 첫숨으로 온 무용수 한묵희는 첫숨의 맞은편에 위치한 원통 맞숨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있는 무기를 확인하기 위해 공연장에 무언가를 설치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는 네 가지 종류의 문화권이 존재하는데, 바로 지구, 달, 화성, 그리고 인공 정착지 '첫숨'이다. 지구에서 출발한 인류가 달, 화성에 정착하게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되면서 서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 미래. 각 배경의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들로 새로운 정착지 '첫숨'에 모이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지구 중력이 1이라면, 달은 6분의 1, 화성은 3분의 1의 중력을 가진다.


여기에서 각 행성(또는 위성)의 중력 무게감이 다르다는 점을 바탕으로 각 배경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비유적으로 표현해 낸 부분이 이 세계관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지구의 중력을 1이라고 본다면, 달의 중력은 지구 중력의 6분의 1, 화성의 중력은 3분의 1 가량 된다고 한다. 지구 출신 사람이 달에, 혹은 화성에 가면 그 중력의 가벼움이 너무나 어색할 것이다. 지구에서 걷듯이 걸었을 뿐인데 우스꽝스럽게 붕 붕 뜨게 된다던지, 아니면 점프해서 뛰어내리는 속도가 너무 느려졌다던지.


처음에 상상했을 땐 "난 너무 재밌을 것 같은데?" 싶었다.


하지만 하루 혹은 일주일, 약속된 짧은 기간 동안 '체험'하는 것과 기약 없이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다르다. 암만 해외여행이 설레고 이국적인 체험이 재미있더라도, 그곳에 영원히 정착하여 일상을 살아가겠다는 결정이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새로운 중력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자,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남아 적응해 내는 자로 나뉘게 된다. 남은 자들 사이에서도 결국 새로운 분파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바로 '네이티브'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이 네이티브들은 그들의 부모들과는 달리, 이 중력권(문화권)을 표준값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선, 달 또는 화성의 중력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 '당연한 환경'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지구의 중력권에 위치하는 순간, 그 무게에 어깨가 쳐지고 걸음이 무뎌질 것이다. 마치 이민 가족의 1세대와 2세대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러니까 배명훈이 '중력의 차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로 풀어낸 건 결국 '문화의 차이'였다.


결국 중심점은 1 중력이라는 기준점을 가진, 지구다. 하지만 그런 지구 출신의 주인공과, 6분의 1 중력의 달 출신 한묵희, 3분의 1 중력의 화성 출신 송영이 만나 서로 다른 양식으로 행동하며 교류한다. 첫숨 너머 미지의 공간, 맞숨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때론 돕기도 하며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그 끝에는 어떤 화합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이야기는 인공 중력이 구현된 정착지 '첫숨'을 배경으로 진행되며, 여기엔 지구, 달, 그리고 화성의 중력이 모두 공존하고 있다. 첫숨은 길쭉한 원통형의 구조물로, 양 끝의 원의 중앙을 회전축으로 두고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 원통 옆면의 안쪽이 바로 정착민들이 생활하는 지표면인 셈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꾸로 매달린 반대쪽 지표면이 보인다. 이 인공 정착지의 중력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원심력이다. 그렇다 보니 이곳의 중력은 지표면에 가까울수록 강해지고, 원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약해진다.


대충 이런 원통형. 파란 선을 회전축으로 두고 회전하면 그 안의 물체들은 원통의 옆면 방향으로 쏠리며 작은 중력이 생겨난다.


지구 출신, 달 출신, 화성 출신의 정착민들이 모두 각자의 중력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인공 정착지, 그곳이 바로 첫숨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각자의 부와 계급 차이가 존재하고, 결국 대다수의 인류는 출신과 상관없이 다시금 일반 지표면, 즉 지구의 중력에 적응하여 살아가야 한다.


달 출신의 한묵희는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지표면을 걷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숨이 희망인 이유는, 이렇게 인공적인 환경 위에 '서로 다름'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실제로 그것을 일상처럼 경험할 수 있는 무대가 온 도시에 펼쳐진다. 힘겨울 정도로 무거운 달 출신의 발걸음도 올바른 배경 위에선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린다. 이게 바로 첫숨에서의 예술의 역할이다.


첫숨의 인공 중력은 '서로 다름'을 경험할 수 있는 예술의 토대가 된다.

첫숨의 공간은 입체적이다. 모두가 같은 평면, 같은 중력 위에 똑같이 굴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레버 하나만 내리면 그 지표면의 중력은 6분의 1이 되기도, 3분의 1이 되기도 한다. 영원한 것도, 당연한 것도 없으며, 세 가지 중력은 그 가변성 앞에 평등하다. 1 중력에 익숙해져 6분의 1과 3분의 1 중력에 대해 잊을 때쯤, 그들은 그 존재를 예술의 힘으로 일깨우며 나아간다. 어쩌면 그 중심에 달 출신의 무용수 한묵희가 있는 건, 화성 출신에게 이러한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게 지구 중력도 화성 중력도 아닌, 낯선 제 3의 중력 - 즉 달의 그것 밖엔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류애를 지키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하던 요즘, 문득 생각이 나 다시 읽었다. 사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엔딩이 기억나지 않아, 궁금한 마음에 다시 읽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엔딩은 잊었지만 오프닝은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그냥 문이었으면 좋겠다. 별로 넓지도 않은 아파트 복도에 다닥다닥 마주 보고 선 현관문 같은 존재. 아니면 창문이어도 좋다. 아파트 6층 건물 두 면을 가득 메운 똑같이 생긴 수십 개의 창문들. 이 문들은 보통 닫혀 있다. 창문에는 늘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쳐 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닫혀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사람은 문이 아니라 집이다. 삶의 공간은 네모난 이차원 통로가 아닌 삼차원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들어차 있기 마련이다. 택시 기사가 몰고 다니는 택시는 그의 삶이 아니라 표면에 떠올라 있는 부표에 불과하다. 카페 점원이 입고 있는 유니폼도 그의 삶이 아니라 그가 내걸고 있는 문이다. 그들이 하루 종일 언제까지고 택시 기사나 점원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뭐하러 그 짓을 한담. (중략)

그렇다. 그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다. 천구(天球)에 나 있는 그 작은 문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문이었다. 천체망원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작은 문이었다.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천체망원경을 쓸 줄 아는 인간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사실상 발견하는 게 더 이상한 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략)

밖에서 보기에는 아무 의미 없는 부표일 뿐이었다. 내가 그 문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 배명훈 《첫숨》7~8p


나의 평평한 시야와 관점 속에서 희망을 잃어갈 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문을 열어보는 것이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은 넓고, 다양한 중력이 존재하며, 나와 같거나 다른 사람들이 아주 많다. 문을 열어보기 전 까지는 모른다. 그 뒤에 괴물이 있을지, 아무것도 없을지, 또는 생각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가 있을지. 어쩌면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세상이 있을 지도. 그것이 바로 이 첫숨 세계가 보여주는 세상의 입체성이다.


첫 번째 숨이라는 의미의 첫숨, 그리고 마지막 숨이라는 의미의 맞숨. 소설 속 '첫숨'과 '맞숨', 두 그림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맞숨의 순간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또 다른 첫숨을 불어넣어주는,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어 읽으면, 그땐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다시 보여 즐겁다. 여담이지만 내가 배명훈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를 꼽자면, 그중 하나는 단연 그의 재치 있는 '독백력'인 것 같다. 《첫숨》에서는 특히나 송영이라는 캐릭터가 이런 독백 같은 긴 대사를 많이 던지는데, 간혹 네 페이지에 달하는 길이로 이어진다. 근데 이게 정말 술술 읽힌다. 송영이 가지는 독특한 캐릭터성이 주는 몰입감도 분명 있지만, 거대하면서도 복잡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도 혼자만의 대사(보통 연설)로 재치 있게 풀어낼 수 있었던 건 분명 작가의 역량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묘사법이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이라는 단편(배명훈 作 단편집 《안녕! 인공존재》에 수록)에서도 드러난다.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과 그곳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설명하는 능력 역시 뛰어난데, 이 소설에선 특히 화성 출신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드레스코드'와 관련한 일화가 흥미로웠다. 어떤 문화권의 사람이 다른 문화권에 녹아들고자 했을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전달되는 동시에, 그 세계에 대한 상상력 자체가 참 다채로웠다.


글을 쓰면서 늘 '어떻게 하면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내 입장에선,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도 써볼 수 있구나.




《첫숨》의 주인공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목적도 알 수 없는,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만큼은 확실한 어떤 일을 향해 움직인다. 그렇다 보니 초중반부에 하나둘씩 정보가 밝혀질 때 '내가 잘 이해한 게 맞나?' 싶은 생각과 함께 혼란할 때가 있었다. 내가 세운 가설만 있을 뿐, 명확한 해결 과제가 주어진 게 아니니.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어려운 전개 방식 그대로가 주제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원래 열린 문 너머의,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는 건 어렵다. 무언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 세상의 전부를 증명해내려고 하면 어려울 수밖에.


개인적으로 SF 소설은 '무언가를 증명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낸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SF가 아닌 많은 이야기들이 비슷한 구조를 띄고 있지만, SF는 특히나 그러하다.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미지의 영역에서 정확한 섭리를 밝혀내는 과정이라는 본질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흔한 방법 중 하나로 우리는 여러 가설들을 세우고 "그 가설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아내려 노력한다. 그 증거를 찾아내면, 우린 더 이상 그 가설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가설을 세우며 나아갈 수 있다. 주인공의 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한 바퀴 비틀어 전개한 '없음'에 대한 추론은 나에게 있어선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었다.


언젠가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없음이 너무 일찍 나타남"이라는 메시지는 바로 그 맥락에서 나온 말이 분명했다. 그는 맞숨 진입로를 검색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다른 다섯 가지의 주제를 더 검색해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필요한 분량의 다섯 배나 되는 쓸모없는 일을 더 한 셈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디코이로 검색해 들어간 어떤 자료 더미에서 이상한 표지를 발견한 것이다. 바로 '없음'이라는 표지를.

내부조사 과정에서 종종 겪는 일이지만, '없음'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일찍 발견된다는 것은 곧 그곳에야말로 반드시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는 말과 같았다. '없음'은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 가끔은 그런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없음'이 존재하려면 '없음'을 만드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존재를 시바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바를 발견한 순간 드디어 범인의 흔적을 찾아냈다고 선언하곤 했다.
- 배명훈 《첫숨》 312~313p


배명훈 작가가 '있음'과 '없음'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앞서 언급한 그의 단편집 《안녕! 인공존재》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별도의 글로 한 번 다루어 보고자 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단연 《첫숨》을 말할 수밖에 없다. 감정이 담겨 있으면서도 이성적이고, 또 위로가 되면서도 간지럽지 않은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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