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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윤 Mar 05. 2024

취재 중 만난 사람. 03

탑골공원 노름꾼

1. 취재를 위해 이곳저곳을 돌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일하면서 현장 방문이나 인터뷰같이 취재원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어쩌면 우연한 만남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사례도 그러하다. 어디서 노름판 운영자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으니까.

 

2. 업무 특성상 카페는 내게 담소를 나누거나 여유를 즐기는 공간이라기보다 일터다. 미팅이나 인터뷰를 카페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 취재 소스를 모아 하나의 콘텐츠로 조합하는 작업 역시 주로 카페에서 진행한다. 대부분 현장 취재를 마친 뒤 주변에 들어갈 만한 카페를 찾는 식이다.


3. 최근 나는 종로에서 현장 취재를 마치고 주변에 적당한 카페를 찾았다. 사람들이 붐비는 인기 카페라던가 대형 프랜차이즈는 되도록 피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매우 많으니까. 다행히 종로에는 동네 카페부터 전통 찻집까지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한 장소가 많았다.


4. 그날은 안타깝게도 무선 이어폰 충전하는 걸 까먹은 터라 심사숙고 끝에 장소를 골랐다. 총 10개 내외의 테이블에 다른 손님은 한 테이블만 차 있던 그 전통 찻집에 들어가 녹차를 한잔 주문한 뒤 노트북 충전기까지 꽂는 데 성공한 나는 그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 마감은 도저히 쉽게 끝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5. 노트북 충전 때문에 나와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성 손님 두 명으로 이뤄진 한팀은 다소 가깝게 착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두 손님의 목소리가 작은 것도 아니었다. 10m 이상 떨어진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얼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6. 훔쳐 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내 기준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바로 탑골 공원 주변에서 장기판을 깔아주고서 노름 장사를 운영하는 내용이었다. A씨는 ‘일 도와주는 동생들과 함께 공원 주변에서 총 4개의 장기 노름판을 운영한다는 어떤 사람’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수입이 꽤 짭짤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노름판 운영자가 A씨 본인임을 확신했다.


7. 일반적인 탑골공원 장기판은 대부분 무료다. 게다가 어르신들의 실력이 상당하기에 젊은이들이 일부러 고수를 찾아 공원 주변을 찾기도 한다. 다만 A씨 지인이 운영한다는 장기 노름판은 공원 외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한 채 알 사람만 아는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8. 5000에 5000. 게임비 5000원에 판돈은 5000원 단위로 걸 수 있다. 금액은 노름 운영자마다 다르게 설정하나, A씨는 5000/5000 방식이 가장 벌이가 좋다고 설명했다. 승자는 최소 1만원을 가져가기에 5000원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다. 판당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 시간 내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승부 처리한다. 일하는 동생들이 직접 심판역할을 해 의도적인 시간 끌기 등 부정행위는 차단한다.


9. 바둑, 윷놀이 등 탑골공원에서 인기 있는 종목은 장기 외에도 많다. 그럼에도 장기를 노름에 쓰는 이유는 가장 대중적이며, 판당 시간이 비교적 짧고, 규칙이 쉬우면서도 치밀한 심리전이 이뤄지기에 보는 사람이 재밌다고. 그래서 분위기를 한번 타면 판돈이 계속 올라가고, 주최자인 본인이 받는 팁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10. 그 외에도 A씨는 주변 다른 장기 노름꾼과 시비가 붙은 이야기, 패배를 직감한 한 참가자가 판을 엎어버리고 도망간 이야기, 판돈을 잃은 참가자가 앙심을 품고서 경찰을 대동해 돌아온 이야기 등 한국형 코믹 스릴러 같은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풀어냈다.


11. 그 결과 나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척 A씨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들리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말이지. 다소 격양된 A씨는 입담도 좋은 데다 적절한 부분에서 비속어와 은어를 섞어가며 말을 이었기에 나의 정신은 온통 A씨가 쏟아내는 언어로 저기 노름 장기판을 둘러싼 장면 장면들을 상상하기에 바빴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으나, 화면엔 도저히 언어라 할 수 없는 자음 모음만 가득했을 뿐.


12. 취재를 하다 보면 기대했던 이야기 이상의 무언가를 얻는 경우가 꽤 있다. 그중에서도 이번 사례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 듯하다. 내 짐작이지만 아마도 A씨는 내가 본인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서 더 열심히 본인의 삶과 경험을 전해준 게 아닐까 한다. 재밌다. 다음번엔 현장에서 그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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