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사는 법, 자존감

다 알아, 내 화려한 싱글라이프를 부러워한다는 거

by 안기옥

네 삶의 주인공은 아기!?


"2주 후면 벌써 예정일이라고?"

"배의 크기로 봤을 때 딸이 확실한 것 같은데, 의사는 암말 없디?"

"초음파 사진을 보니 통통 볼이 딱 엄마 닮았네"


친구의 남산만 한 배를 둘러싸고 다양한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예정일이 코앞인 것 치고는 아직 윗배가 너무 불러 있다는 선배 엄마의 의견은 매우 타당하게 들렸다. 친구는 뱃속 아기의 몸무게가 3kg이 넘어 출산의 난항 예상된다며 걱정스러워했고, 이에 제왕절개가 나쁜 아디이어만은 아니라는 언급이 나왔다. 출산과 산후조리에 대한 이야기는 최신 육아 트렌드와 각 어린이집의 장단점, 치솟는 양육비 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애 키우기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들이 펼쳐지는 가운데에서도 다른 친구의 세 살배기 아들래미는 여전히 주인공이었다. 아가의 몸짓 하나 옹알이 하나하나가 모두를 들었다 놨다 했다.


하늘이 열린 성스러운 개천절을 맞이해 몇 달 만에 동기들이 모였다. 강남구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한 친구 커플의 신혼집이 장소였다. 잘 정돈된 가구와 과하지 않은 인테리어에서 '안정된 가정'이 보였다. 꽃다운 청춘을 함께 보낸 우리 4인방은 머리에 피가 마르면서 나를 제외하고 다들 결혼을 했고, 우리 모임은 가족 모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화두는 항상 아이와 육아이다. 아기도 싫어하고 정작 엄마도 아닌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아주 가끔 보는 세 살 난 조카 이야기를 덧붙였다. 감흥 없는 대화였다. 하늘이 콱 닫힌 듯 답답했다.



There's a Fire Starting in my Heart

But you don't care...


실은 그날 아침에 본 팀 버튼의 새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요즘 열과 성을 다해 작업하고 있는 <Rolling in the deep> 리믹스를 들려주고도 싶었다. 그런데 내 취미 생활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 없어 보였다. 예전에 모이면 한창 달떠서 얘기했던 시국과 정국에 대한 얘기도 일절 없었다. 최소한 백남기 농민 사망에 대한 애도는 다 같이 했어야 했는데, 새 생명에 대한 걱정과 흥분이 가득한 이 모임에서 처절한 죽음은 남일이었다.


모임의 끝, 가족별로 깔끔한 세단을 타고 떠났고 나는 큰길까지 차를 얻어 탔다가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이날은 가장 좋아하는 한남대교를 건널 때에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한 밤 중의 한강 위에는 고독한 바람이 사무쳤다. 인생 성공 길과 아무 상관이 없는 퇴사며 남미 여행이나 꿈꾸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귀가하는 내가 초라했다. 코딱지만 한 원룸 문을 열었을 때, 시야에 들어온 너저분한 살림들이 꼴 보기 싫었다. 남편도, 돈도 없는 나는 여전히 혼자서 불확실한 곡예만 즐길 뿐이었다.


혼자서만 다른 길, 누구도 관심 없는, 이래도 괜찮을 걸까?

음악도 틀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LOSER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거울 속에 넌 JUST A LOSER
<빅뱅, Loser> 어제의 곡.



어쩔 수 없다, 내가 더 사랑할 수밖에


"주근깨 투성이 얼굴이 부끄럽지 않으냐, 요즘 레이저 수술은 수술도 아니다"

"그 나이에 시집도 안 가고 큰 일이다. 지금 임신해도 초초노산이다"


외모, 사회적 지위, 재산 등 오만가지 사항에 끊임없이 남과 비교되는 세상에서 자존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는 '나이 든 노처녀'의 모멸적 시선도 감수해야 한다. 항상 구김 없는 양복 쫙 빼입는, 내가 늘 굽실대는 광고주가 나랑 동갑이란 사실을 알게 된 날, 박탈감과 비애감으로 벌컥벌컥 몇 잔의 맥주를 들이켰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마음가짐으로 꿋꿋하게 버텨왔지만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고 들어오는 훅(hook) 한 방에 정말 훅~ 갈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대체로 내가 가장 믿거나 의지하던 이들에게서 받는 몰이해 또는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관계'라는 걸 맺고 있는 사람 정도에게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친구들에게만큼은 내가 왜 남미 여행이라는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됐는지, 브런치에 어떤 심정으로 글을 쓰는지 조곤조곤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거 아니? 내 눈에 비치는 너희들의 <행복한 가정의 전시>는 사실 좀 폭력적이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너만은 날 봐주길 바랐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무엇에 기뻐하는지.

사실 그랬어.


타인의 인정, 그것은 인지상정! 그런데 그 작은 기대조차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결국 너 자신이 스스로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걸 점점 더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더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더 애정을 쏟기.


공교롭게도 친구들과 교감하지 못했던 영화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책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분이야말로 자기 존중 분야의(Self-relience) 역대급 사상가이다. 영화의 장면장면을 조용히 다시 떠올려보니, 영화에 나오는 이상한 아이들도 자존감이 넘치는 별종들이었다. 아웃사이더들의 엄청난 능력과 활약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내다.


If I have lost confidence in myself, I have the universe against me.
내 안의 자신감을 상실하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Nothing can bring you peace but yourself.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Ralph Waldo Emerson


그리하여, 오늘도 이 글을 쓰며 힐링을 하고 자존감을 되찾았다. 창작 활동은 역시나 인생의 별이자 나를 잃지 않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된다.

잊지 않으리,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나는 이런 평범한 사람
많은 세월 살아왔지만
아직은 부족하지 그래서 난 가네
나는 나의 길을 가
소나기 두렵지 않아
구름 위를 날아 어디든지 가
외로워도 웃음 지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싶네
그게 나의 길
<언니네이발관, 산들산들> 오늘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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