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고 효과 좋은 잔주름 케어
옥섭 씨는 설화수 마니아다. 화장대에 설화수 크림과 에센스, 스킨, 로션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 몇 번 턱턱 바르면 금방 없어질 것 같은 크림이 본 크림보다 2~3배는 크고 어여쁜 용기에 담겨 있다.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을 때에도 화장품은 무조건 비싸고 좋은 걸 써야 한다는 옥섭 씨의 신념은 단단했다.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비좁게 살던 단칸방에 옥섭 씨의 화장대는 꽤나 큰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에 주기적으로 옥섭 씨를 찾아오던 아모레 방문판매원은 우리 집 사정을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 내 이름도, 동생 이름도 기억하고, 공부는 잘하고 있느냐 따위의 질문도 했다. 방문판매원 아주머니가 오시는 날에는 으레 새 화장품 세트가 들어왔고, 만 원짜리 지폐 뭉치가 건넸다.
옥섭 씨의 화장품이 꽤나 고가의 상품이란 건 대학에 와서 처음 알게 됐다. 서울로 올라가는 나에게 옥섭 씨는 '20대 라인' 화장품 세트를 넣어줬는데, 어느 날 같은 학과 친구가 내 자취방에 와서는 짐짓 놀라며 얘기해줬다. "야, 너 보기보다 화장품은 좋은 거 쓴다." 그전까지 책상 위에 방치해뒀던 화장품을 그날 이후 조금 관심 있게 발라봤다.
서른 초반, 화장품 회사에 취직했을 때 나는 화장품의 실체를 알게 됐다. 매우 적은 원가로 공장에서 만드는 화학품이 예쁜 용기에 담겨 고가로 팔려 나간다. 우리는 화장품 성분보다 패키지 디자인에 더 신경을 썼다. 이상하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를수록 매출이 올랐다. 한글을 가장 사랑하는 나는 그 회사에서 온갖 휘황찬란한 영어 수식어를 갖다 붙이면서 '마케팅'이란 걸 했다. 옥섭 씨에게 이 같은 실체를 알리며 그녀도 수십 년간 속아온 아모레의 뻥에서 하루빨리 벗어날 것을 조언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르다. 같은 아모레 제품도 방문판매원이 딱딱 눈 앞에 가져온 것과 홈쇼핑, 온라인에서 싸게 파는 건 다 차이가 있어. 그런데 너희 회사 거랑 아모레가 똑같겠니?"
인간의 믿음이란 이렇게 강고하구나, 마케팅의 롤모델은 결국 종교였구나, 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아모레가 친환경 종이 용기를 개발했다는 뉴스를 봤다. 되도록 친환경적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나로선, 쓰레기의 주범인 화장품 회사가 이런 발상을 했다는 사실이 일단 반갑다. 문득 용기가 종이로 바뀌면 당연히 화장품 가격도 팍 낮춰야 할 텐데, 그렇다면 옥섭 씨는 이 '비싸고 좋은' 화장품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이어갈까 궁금해졌다. 종이팩에 든 설화수라..., 진짜 실현될까? 아마도 '더 비싸고 좋은 종이 용기'가 친환경 프리미엄을 안고 옥섭 씨 잔주름을 케어해 줄 것 같다. 속 답답한 내 잔주름은 더 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