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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ka Mar 11. 2023

사랑의 중력(3)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

3)



 내가 생각났다며 네가 사 왔던 펜을 나는 아직도 쓰지 못했다. 펜은 사용하면 사라져 버릴 테니까, 반대로 소중히 간직하면 먼 훗날 펜을 보면서 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와 함께 했던 소중한 기억이 공유되어 있는 물건은 다 그런 가치가 있었다. 소모품에 불과한 캔들도 너는 왜 사용하지 않느냐며 투덜대곤 했지만 나는 미처 내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말을 둘러대곤 했다. 닳으면 사라지는 것과는 달리 사랑은 영원 속에 살아있기를 바랬다.

 영원함이 결핍되어 있기에 영원함을 갈망하는 것이니 사랑엔 죄가 없다지만 형벌은 존재한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오만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편견. 존재의 본질이 고통일지라도 사랑이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고통. 사랑이 벌인 줄 알았더라면 영원하길 바라지 않았을 텐데, 고통은 이미 많이 소유하고 있어 더 원하지 않는데. 나는 꽤 시간이 지난 뒤라 사랑의 끝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이별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연히 얼마 전, 이미 너는 우리가 만든 중력에서 벗어나 다른 중력의 영향권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이후로 좋았던 추억들이 모두 원망과 분노, 미움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에 며칠 밤낮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상태의 지속은 우리의 시간을 다른 원동력에 빗대어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사랑은 죄가 없을지 몰라도 널 사랑한 건 분명히 죄였다고, 나의 숨을 죄인 거였다고.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의 심장으로 너의 행복보다 나의 안녕을 위해서, 네가 준 펜을 찾아 꺼냈다. 펜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빈 종이에 글을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완성된 글의 제목은 '너를 지우기 위해 쓴다'였고, 그는 글을 보자마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스스로를 향한 사랑엔 오직 영원함이 가득하기를, 하지만 매 순간 끝을 느낄 수 있는 축복도 함께하기를."




 나는 사랑을 보고, 만진 것이 아니었나?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순식간에 미움과 아픔으로 뒤덮이고, 좋은 기억의 편향과 나쁜 기억의 망각이 시간 앞에서 힘을 겨루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것이고, 어떤 선택을 하지 않아도 괴로울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사랑을 겪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답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고통이 찾아오자 머리가 지끈거려 오고, 그의 말들 하나하나가 듣기 거북해졌다. 그녀를 미워하지만, 그녀를 미워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표출이 그를 먹잇감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를 향해 "당신이 사랑을 어떻게 아냐"며 소리쳤다. 사랑은 이렇게 아프고 괴로우며 슬픈 게 아니라, 좋고 완벽하며 또 행복한 것 따위가 아니었냐고. 그는 부정도 긍정의 의미도 아닌 표정을 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난 이후로 내가 위로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만든 사랑의 맥락을 그는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처절하게 미워하며 불행과 행복이 뒤섞인 우리의 맥락을, 우리가 아닌 그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주변의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사랑과 감정에 대해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들을 종합해 봐도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서로 뿐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단면만을 볼 수밖에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생각의 틀이 무너지고 나서야 아집이었고,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사랑을 끝내지 못했던 나에게 그의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날 이해한 것도, 날 위해서도 아닌 그저 듣기 싫은 잔소리일 뿐. 어른들의 쓸데없는 참견과도 같이 남을 생각한다는 표현 아래 숨겨진 자기 불편함의 분출.

 나는 여태 그래왔듯이 혼자서 해내겠다며 그를 밀어냈다. 그가 무슨 말을 더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귀를 닫으며 그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가 사라지길 바라지만 또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켜 휘몰아쳤다. 나는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몸 밖으로 뱉지 못하며 쭈뼛거렸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세상에 날 이해해 줄 사람, 단 한 명이 없음에 굳이 서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멈춰 있었는지 모른다. 나의 행동은 그에게 상처였을까? 그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의도 역시 내가 짐작한 바가 아닌 남을 위할 수 있는 연민과 사랑에 기반했을 텐데,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화풀이를 해버린 내 잘못인데 왜 그가 상처를 받아야 했는가. 그는 다정했으니 마땅히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호의를 베풀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는 그가 나의 죄까지 짊어지고 떠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이, 그의 사랑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베풀었던 희생과 사랑이 느껴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울음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토해지고, 슬픔이 아닌 사랑의 감정이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그에게 찾아가 고마웠다고,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돼."

 그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불쑥 나타나서 사라지기도 했던 위치에서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까지 그대로였다. 어둠을 가득 메웠던 상실과 고통이 서로를 안아주더니 사르르 녹아버리고, 이내 그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아, 저것이 사랑인가. 사랑의 힘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마주하며 그와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은 시간을 상정한다. 멈추길 바라는 마음보다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가짐이라 생각하며, 내가 존재하는 한 사랑은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려 본다.



 이제야 머리가 명확해지고 제대로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아직 이별 중이며 관계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보이고, 그녀를 미워하지만 아직 사랑하고 있는 나의 모습도 보인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게 되는 미래의 시간이 보이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너와의 기억이 보인다. 사랑이 만든 유한한 공간이 보이고 그의 존재가 보인다. 사랑의 끝 너머로 펼쳐진 그의 사랑이 보인다. 그가 만든 사랑의 중력에 빠지자 아름다움의 좌표가 곳곳에 찍히고 영속성과의 일체에서 발현되는 감정의 고양이 사랑의 고리를 만들어낸다.

 그가 이끌어낸 순간의 아름다움을 겪고 나니, 비로소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들려왔던 목소리부터, 신성한 계시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속삭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존재. 현재까지 믿음의 근간을 이루고 보이지 않지만 구원을 상징하는 존재. 누구나 그를 조우하기 원하지만,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존재. 사랑이, 삶이, 나의 세계가 끝날 때까지 영원히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의 존재를 외부에서 찾는다면 신의 사랑으로, 내면에서 인식한다면 나와의 사랑으로 나타나겠지만 어느 형태든 완벽함을 상정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완벽한 세계가 그와 함께하는 인식체계에선 가능하다는 믿음.

 순간의 감정과 생각이 영원함에 포함되어 있고, 아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보면 너와의 사랑과 이별도 같은 거라고,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잘못도, 못남도 아닌 사랑이 가진 오류의 순간에 함께 빠져버린 것뿐이라고. 유한한 이별이 타오르며 사랑과 마찰하는 순간에 우리는 영원히 눈이 멀어버린 것뿐이라고.

 눈을 감으니 굴곡되지 않은 네가 보인다. 그러다 너의 존재가 점점 희미해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면, 다시 눈을 감아본다. 사랑의 중력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테니, 행복을 렌즈 삼아 사랑의 기억을 들여다본다. 은빛으로 빛나며 흐르는 강처럼 순수한 사랑의 파편이 우리가 함께 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나는 그 사이에서 고통과 상실에 기대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민다. 사랑의 중심을 향해, 함께 가보지 않겠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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