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에 맞선 언어의 역설
문학의 모더니즘적 경향은 20세기를 거쳐 미국 시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해서 나타난다. 물론 포스트모던 시, 즉 전후 미국 시인들은 드러내 놓고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실험정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하지만 시어를 전통적 쓰임새, 공적 이데올로기, 관습적 태도로부터 떼어내어 단순한 감정의 토로나 자연 묘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비판의 목소리가 현대미 국시가 단지 모더니즘적 언어 실험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그렇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조류라 해도 언제나 그 조류에 벗어나는 예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문학사에서 경향이나 ‘이즘’ ‘학파’등의 구분은 많은 경우 비평적 편의를 위한 사후적 구분이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시류적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 혹은 더 멀건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되어 20세기 초엽에 완전히 세상을 바꾸게 된 시대정신이자 경험의 양질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더니즘이냐 사실주의냐, 혹은 낭만주의냐 등의 물음은 무의미하다.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에서 생산되는 문학은 어떤 경우이든 창작자의 선택과 무관하게 모더니즘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가장 덜 모더니즘적으로 보이는 생태시의 경우에도 모던적 경향은 나타난다. 생태시인들은 여느 현대시인들보다 전통적 낭만주의의 특징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 관찰과 성찰의 시적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 궁극적으로 자아의 온전함을 지향한다는 점 등에서 그렇다. 하지만 현대의 생태시는 자아와 대상 사이의 괴리와 언어와 재현의 완벽한 불가능성이라는 모더니즘의 인식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드러내 놓고 현대적 모순이나 언어의 불가능성을 다루지 않더라도 이미 함축적으로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문제 지형은 더욱 보편적이다. 생태시인을 대표하는 웬델 베리의 시를 읽어보자.
내 안에서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 자라나
한밤중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잠이 깨어
나와 내 자식들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질 때
나는 숫 오리들이 아름답게 쉬어가고 왜가리들이 먹이를 찾는
호숫가에 가서 눕는다
그곳에서 나는 야생이 주는 평화에 빠져든다
그들은 부질없는 번민으로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곳에서 고요한 물의 존재감에 나를 맡긴다.
내 머리 위에는 한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반짝인다
자신의 빛을 이제 비로소 내보이기 위해 종일 기다렸던 별들
잠시 동안 나는 세상의 은총 속에서 쉬고, 자유로워진다.
--웬델 베리 (Wendell Berry), <야생의 평화> (1985)
이 시는 짐짓 일반적인 자연시인 듯 보인다. 살아가는 일에 대한 번민이 생겨 잠 못 이루는 화자가 한 밤중에 일어나 호숫가를 찾아 평화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자연의 치유력에 관한 전형적인 시이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란 표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화자 자신도 이 평화가 오직 순간적일 뿐임을 알고 있다. 이미 인간과 자연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 있고, 그 거리를 좁힐 가능성은 순간일 뿐이다. 생태시인이자 현 미국의 가장 대중적 시인으로 꼽히는 메리 올리버의 시를 한 편 읽어보자.
누가 세상을 만들었나?
누가 백조를 만들었나?
그리고 검은 곰은?
누가 여치를 만들었나?
바로 이 여치 말이다.
방금 풀밭에서 뛰어오른
지금 내 손에서 설탕을 먹으면서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고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아주 크고 복잡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이 여치를.
이제 이 여치는 창백한 앞발을 들어 올려 얼굴을 꼼꼼히 씻는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선 휙 날아간다.
나는 기도가 뭔지 정확히 모른지만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는지
어떻게 풀밭에서 무릎을 꿇는지
어떻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축복을 누릴지
어떻게 들판을 거니는지 나는 안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보냈다.
내가 달리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말해 보라.
모든 것이 결국 죽지 않는가?
게다가 너무 빨리 죽는다.
말해보라, 하나뿐인 그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그 소중한 생명으로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가?
-- 메리 올리버, <여름날>(1992)
이 시에서 화자는 여름날의 여치를 보고 인간 내면의 야생을 느끼고 자연물 상의 야생과 교류하는 것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 웬델 베리의 고즈넉한 어조와 달리 메리 올리버는 다소 도전적으로 현대인에게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경고한다. “그대,” 즉 시인이 말을 거는 독자인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이다. 이 야생의 존재에게 시인은 당신은 이 여름 한낮을 어떻게 보내려 하느냐고 묻는다. ‘누가 ~을 만들었는가?’로 반복되는 시 도입부의 질문은 창조의 신비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시가 끝날 무렵 “모든 것이 결국 죽지 않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에 의해 생명의 유한성이 환기된다면, 마지막 시행에서 독자에게 던지는 세 번째 질문은 수사적 의문형이다. 질문과 질문 사이에 놓인 시행들은 이 긴박한 삶의 유한성 속에서 우리가 주어진 생의 신비를 경험하기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이 시는 ‘여름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누가 만들었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작은 여치 한 마리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름날, 그러나 곧 사라질 (죽을) 여름날은 다름 아닌 우리 삶이다.
이 시의 주제가 소위 자연시의 전형성을 띠고 있지만, 베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깊은 골을 인식하며, 이미 합일하기 어렵게 된 현대인의 소외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령 시인이 기도를 할 줄 모르지만 자연 속에서 고요히 걸으며 자연을 관찰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때 이미 시인은 여름날이 빨리 지나가듯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진다는 필멸 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 현대인이 소중한 생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마지막의 질문은 현대의 소비주의와 문명의 덧없음을 역설적으로 피력한다. 두 시인 모두 ‘야생성’을 대안으로 제안하지만 어떤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답이 되지 못함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시적 경향을 보여준다.
위 두 생태시가 철저히 낭만주의적 자연 시라는 구분법을 넘어서 모더니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면, 로버트 크릴리의 다음 시는 낭만주의적 연애 시 전통에 정면 도전하고 있다.
사랑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네 머리를 반으로 쪼개서
양초하나를 넣으리라
네 두 눈 뒤에
너와 나 사이 사랑은 죽는다
액막이와 순간적 경이로움이 갖는 덕목을
잊는다면.
-- 로버트 크릴리 (Robert Creeley), <경고> (1955)
크릴리의 시는 서양의 시적 전통의 대표적 장르인 낭만적 연애 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뒤틀리고 강렬한 이미지와 잔혹성을 통해 연애 시 장르를 해체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시적 화자는 연인의 사랑을 지속시켜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사랑의 불멸성은 액막이와 순간적 경이로움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환상을 깨버린다. 찰스 번스틴과 언어 시운동을 함께 한 크릴리의 시가 위 두 생태시인이 제시한 야생성을 비틀어진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물론 베리의 자연적 야생성과 올리버의 인간 내면의 야생성과는 다르다. 크릴리 시의 야생성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연인의 두개골을 반으로 자르는 잔혹함에 담긴 치명성에서 비롯한다. 올리버가 네 속의 야생성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을 때 인간 외적 자연의 생생한 야생성과 대응하는 생명성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야생성이 늘 순하게 길들여지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자면 베리는 야생이 평화를 준다고 하지만 그것은 베리가 그렇게 야생을 대하기 때문이다. 숫 오리와 왜가리, 별이 있는 야생은 얼마든지 난폭하고 잔혹하게 변할 수 있다. 올리버는 작은 곤충 여치로부터 자연의 생명을 경험하면서 베리와 달리, 인간 내면의 야생성, 크게 보아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타고난 생명력을 떠올리지만, 올리버의 시는 그것을 찬미하거나 자연과의 일체로 재빨리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내면의 야생을 도외시하거나 혹은 느끼더라도 무엇을 할지 선택에 따라 미지의 가능성이 많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의 야생성이 그러하듯 인간의 야생성 또한 그 안에 연인의 머리를 갈라 버릴 수 있는 야만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자연과 달리 연인의 머리를 가르면서도 그것이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인간의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를 하기 마련이다. 크릴리의 시는 인간적 야생성의 두 얼굴을 통해 인간 역사를 거의 함께 한 사랑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한편 현대적 감수성을 처연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짐짓 다른 두 파의 시들을 비교함으로써 어떻게 20세기의 미국 시가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을 타고 나 언어를 파괴하는 동시에 창조함으로써 세상과 개인 사이의 괴리와 재현 불가능성을 언어를 통해 역설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는지 일별 할 수 있다. 이 시들은 인간과 자연, 전통적 관념과 체험적 삶, 현대적 경험의 혁신성과 언어적 한계들을 시적 전통에 빗대어, 그러나 역설과 아이러니로 다룸으로써 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 이 글은 문예지 <외지>에 실린 현대미 국시론의 일부분이며 수록된 시의 번역은 필자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