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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Mar 09. 2019

21세기는 시를 읽는다

   2000년대 미국 시의 현재와 미래 - 기획1


21세기 새천년은 두 대의 여객기가 뉴욕 맨해튼의 상징적 건축물을 향해 돌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적어도 미국의 21세기는 그랬다. 9/11 이후 미국 사회는 2008년 경제공황까지 공동체란 무엇인지, 국가의 통제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또 갈수록 거세지는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위치에 대한 공격과 비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관련한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은 단지 이슬람 무장세력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냉전시대의 몰락 이후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국제적 세력관계가 수면으로 떠오름과 동시에 레이건 시대의 번영과 통제를 거친 미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심판대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부시 정권이 베일로 덮으려 했던 법 정의와 민주주의는 애국법(Patriot Act)을 필두로 가사상태로 들어갔다. 국가안보와 개인의 안전을 위해 미국 시민들은 기꺼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슬람교’라는 이름의 종교적 인종적 레이블이 ‘악’ 혹은 ‘적’으로 둔갑하면서 자행된 개인적 인권침해는 묵인되었고 공항 수색대를 통과할 때마다 두 팔을 올리면서 우리는 두 세기 동안 미국을 떠받쳐온 자유, 민주, 평등의 신념을 잠시 망각하고 항복의 상징적 행위를 반복해왔다. 이후 정권이 바뀌었어도 공권력의 개인사찰은 중단되지 않았고 2008년 경제공황을 겪고 난 뒤 무제한적인 경제적 성공에의 욕망은 속도를 더 높여 질주하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를 일으킨 21세기의 첫 15년, 시는 아직 숨이 멎지 않았다. 9/11으로 몰아닥친 사회 정치적, 국제정치의 회오리에서 미국 시민들은 거리로, 광장으로, 소모임방으로 나와 토론을 하고 의견을 개진했다. 그때마다 언어는 시가 되었고, 음악이 되었다. 9/11 이후엔 뉴올리언스에 몰아친 태풍 카타리나의 재난과 경제위기로 인한 99%의 점령(Occupy) 운동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미국 시민들은 곳곳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반복해서 실험대에 올렸다. 그곳에는 늘 시가 있었다.


광장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 앉았고, 전문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은 시인들은 웹진과 소규모 출판(small press)으로 독자와 만났다. 이렇게 시는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시재단(Poetry Foundation) 회장을 역임한 바 있던 존 바(John Barr)가 단호히 현재 시가 대중과 분리되어있다고 말할 때 그 시는 강단 위주의 소통되지 않는 시이다. 그간 시를 포함한 문학 전반이 대학 문예창작과 중심의 강단 학술계에서만 유효했다면 최근 디지털기기의 발달과 독립출판을 위시한 출판 개혁운동 등은 이제 더 이상 시가 아카데미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지금 시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곳곳에서 21세기 현 단계의 시를 정리하고 개념화하고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몇몇 앤솔로지가 21세기 미국 시라는 표제 하에 출간되고 있고 다양한 시 협회와 단체의 온라인 저널에서 지난 15년간의 시에 관한 여론조사 및 평론이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현재 미국 시의 동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IT기술에 따른 디지털 시대는 기왕의 인문학자나 문학가들의 우려와는 달리 시의 발전과 변화에 긍정적이다. 웹진과 온라인 커뮤니티는 문단과 학계, 출판이라는 세 기존 생산라인의 좁은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시적 정신을 추구하며 실험적 시도를 하는데 적합했다. 종이책으로 만들어져 출판시장에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급속히 줄어들어 독자와 직접 빠르게 만날 수 있으며, 평단이나 출판시장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문학적 경향에 구속되지 않고 시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단의 신예들을 배출하는 주요 플랫폼이던 문예창작과의 역할이 이로써 줄어들고 문학창작이 더 이상 제도권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개인 블로그에 시를 쓰고, 원하는 독자에게 페이팔(Paypal) 어카운트로 시를 파는 시대가 열려 시인과 독자의 거리가 불필요한 제도와 유통구조를 넘어 더욱 가까워진 셈이다. 이런 혁신적 탈바꿈을 보수적 시선으로 개탄하기보다는, 기존의 종이책과 출판 구조, 제도적 교육체계에 덧붙인 좀 더 자유롭고 활동적이며 에너지 넘치는 다양한 출구와 플랫폼이 생겨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태도일 터이다. 


특히 IT시대에 시가 각광을 받는 이유는 온라인 공간이 어찌 보면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압축성과 이미지 중심의 문자 텍스트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최신 시적 형식으로 "시각적 시 Visual poetics”라는 장르가 한 예이다. 타이포그래피와 이미지를 구성해 시각성을 강화하는 이 장르는 음악, 미술, 사진과 타이핑이라는 특수한 기술이 만나 새로운 디지털 언어예술을 창조해가고 있다. 말하자면 커밍스의 시가 IT기술과 만난 셈인데, 모더니즘의 언어적 실험정신이 2차 대전 후 발전되어 21세기에 기술적 혁신을 통해 종이책을 넘어 가상공간에서 그 시적 실험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궁극적으로 언어예술이다. 다른 문학 장르보다 언어의 재현성을 더 의식하고 집중하는 것이 시이다. 시에서 오직 이야기를 듣기만을 바라는 것은 시를 정치적 도구만으로 국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에서는 이야기를 넘어서 언어가 우리를 이끄는 미지의 시공간, 인식과 의식을 가로지르는 무의식과 욕망, 기억의 저편을 탐색하는 언어를 만나야 한다. 


둘째, 지금 시는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이미 20세기부터 시는 자신과 정반대에 놓여있는 대중문화와의 경계를 늘 넘나들었다. 로버트 로월의 시 <스컹크 시간>이다.   


자동차 라디오가 쿵쾅거린다

“사랑, 오 부주의한 사랑….”

내 혈액세포 하나하나가 흐느낀다

마치 내 손이 목을 죄고 있는 듯

나 자신이 지옥이다

아무도 여기 없다-

오직 스컹크만이

달빛 아래서 먹을 것을 찾아 기웃거리고

메인스트리트를 따라 전진한다

흰색 줄무늬, 미쳐가는 눈동자에 붉게 이글거리는 불

삼위일체 교회의 

백묵가루처럼 희고 뾰족한 탑 아래


나는 뒷 계단 위에 서서

이 풍요로운 대기를 들이마신다

어미 스컹크가 새끼들을 줄줄이 세우고 쓰레기통을 비운다

뾰족한 머리를 사우어크림통에 박고

타조 같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위협하지 않는다

              -- 로버트 로월 (Robert Lowell), <스컹크 시간> (1959) 중에서

  

로월의 시는 대중문화의 상품과 키치적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시적 정서를 환기함으로써 전후 미국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이 시의 배경은 교회 탑이 내려다보고 있는 뒷골목의 밤 시간이다. 제목의 스컹크 시간은 이런 배경을 의미한다. 스컹크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둡고 스산한 골목에는 더 이상 삼위일체의 신은 없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싸구려 감상의 대중음악과 사랑은 부주의하게 이루어지고 사우어크림통이 상징하듯 값싼 패스트푸드 같다. 현대인에겐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지옥이 되고 가장 동물적이어야 할 스컹크는 동물성을 상실한 채 도시의 한 구석에서 먹이를 찾아 버려진 음식에 머리통을 박을 뿐이다. 이미지, 언어적 구성이 파격적일 뿐 아니라 통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가치를 한낱 일상적인 것으로 강등시킴으로써 얻는 효과를 갖는다. 


이런 모더니즘의 대중문화적 요소는 21세기에 좀 더 부각된다. 특히 힙합과 랩을 위시한 대중가요의 흥행이 시에서도 나타난다. 랩 음악은 멜로디와 가창력보다는 리듬을 중심으로 가사, 즉 내용을 읊조리는 식의 음악이다. 전통적인 노래와 달리 랩 음악은 가사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리듬과 결합되어 낭송하는 방식은 시적 언어의 중요성을 높인다. 따라서 많은 젊은 시인은 랩 가수이기도 하고, 시낭송이 종종 콘서트 형식을 띠기도 한다. 로월의 키치적 시가 여전히 모더니즘적 틀 안에서 시적 난해성을 보여준다면, 현재 랩 풍의 미국 시는 대중에 좀 더 친화적인 것은 분명하다. 대중음악적 경향뿐 아니라 시는 현재 영화와 광고 등의 상업적 대중문화와도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시가 더 이상 전통적 운율, 리듬과 어휘, 소재 등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현대적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가 대중과 유리되어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대중적 경험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문화가 시로 유입되는 것은 단지 시가 대중문화를 추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로 재구성된 대중문화는 우리의 현실적 경험이 언어예술화 되었다는 뜻이다. 시는 늘 적극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해서 해석하고 우리 경험에 시적 언어를 준다. 그것이 시가 우리 옆에 있어야 할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셋째, 여성, 소수인종, 동성애자 등의 다양한 소수집단 혹은 비주류 집단의 시가 급부상하고 있다. 문학계에서 비주류 집단의 약진은 20세기 중반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온 변화이지만, 특히 21세기 초에 두드러진다. 양적인 증가가 언제나 질적 수준을 의미하진 않았다면, 최근 여성 시인들의 증가와 활약은 저변의 확대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든 시의 지형이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 시인들 자신이 여성성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온라인 커뮤니티, 학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여성’이라고 할 때 미국 주류에서 여전히 아쉽게도 많은 경우 ‘백인 여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면, 따라서 여성의 약진이라고 할 때 많은 경우 백인 여성 시인의 활약을 암시한다면, 소수인종 작가들의 활약은 때로 여성작가들의 성취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2009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을 역사상 처음으로 라티노계 여성작가 헤레라(Herrera)가 공동 수상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또 20세기 후반 아시아계 미국 시인들의 활발한 활동에 맥신 홍 킹스턴, 데이비드 무라, 키미코 한, 캐시 송 등 굵직한 이름을 남겼다. 랭스턴 휴즈, 마야 앤젤루를 위시한 많은 흑인 시인들은 이미 20세기 동안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자리에 올랐다. 흑인 시인들의 주류 문단에 입성하면서 흑인 특유의 감성과 재즈적 언어, 영감이 미국 시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했다면, 라티노계와 아시아계 미국 시인들의 경우는 흑인 시인들과 달리 이중언어적 감각을 미국 시단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많은 라티노계 시인들이 이중언어로 시 활동을 하거나 이중언어적 감성과 표기를 적극적으로 시에 도입하고 있고, 아시아계 시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계를 대표하는 미국 시인은 명미 김(Myungmi Kim)이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 온 1.5세대 시인 명미 김은 언어 시운동에 속하는 시인으로 이민의 경험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 정치 및 문화의식의 문제를 예리한 언어적 실험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대표적 시집 <국기 아래서> 중 일부를 읽어 보자. 


한때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 

부엌에서 (들리고, 발견되고, 만들어진) 떠드는 소리

물을 끓이려고 올려놓은 주전자는 더 이상 달그락대지 않고

전치된 소음. [...]

대부분 우리는 언제 세워졌는지도 몰랐던 다리를 건너고 있다

              -- 명미 김, <국기 아래서> 중에서 


이 시는 이주의 경험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어휘는 ‘전치 혹은 이산(displacement)’이다. 떠날 때의 상황과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기억 속 부엌의 소음이 연결되고 “언제 세워졌는지도 몰랐던 다리”를 건너 돌아오지 못할 이주의 강을 건넌 경험을 표현한다. 명미 김 같은 시인들이 최근에 주류에서 활약하며 인종적 경계를 허물고 인종적 특수성을 사용해서 영어라는 언어의 제국주의를 해체하고 있는 반면, 기존의 아시아계 시인들은 자신의 인종적 특수성을 서사화하는데 집중해왔다. 그중 대표적인 시인이 중국계 시인 리영 리인데, 그의 시 중 한국 독자들에게도 유명한 <감> 같은 시가 그 예이다. 하지만 최근 그의 시는 변화를 보여준다. 인종적 민족적 뿌리를 모색하고 이민자로서의 애로사항을 다루는, 자서전적 경향에서 벗어나 보편적 주체, 특히 시적 화자의 문제에 집중해서 기존의 서정적 자아를 해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누군가 정원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나는 점점 작아져갔고

타인에 대한 나의 부재는 점점 자라났고

개미들 사이에서 나이 들어갔으며


활짝 벌어진 꽃들 밑에서 고고(孤苦)해져서

나 자신에게도 새롭고 낯선 이방인이 되었다.

내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옆집 아이의 이름처럼, 아니면 여름 한 시절 함께 놀았던

내가 제일 좋아한 사촌의 이름처럼 멀게 느껴졌는데


그땐 고요가 내 진짜 이름 같아 보였고

숨겨진 땅속에서 태어나

가깝고도 잘 들리지 않는 노랫소리 같았다.

고요에게 고요로,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아침 내내 새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선포했다.

      -- 리영 리(Li-Young Lee), <드러내다> (2001)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이름과 낯설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시는 어느 날 아침정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룬다. 나와 낯설어지는 경험은 어떤 큰 사건에서 생기는 것보다는 일상의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화자는 점점 작아지기도 커지기도 하면서 내 이름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해서 ‘고요’로 답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새들이 나를 선포한다. 이처럼 리영 리의 최근 시는 나라는 자기 동일성의 인식으로부터 주체를 떼어내어 재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자의식, 혹은 주체의 해체는 소수인종의 주체에겐 불가피한 의식일 수 있다. 소수인종의 경험을 자서전적 고백과 인종 지학적 자료에 국한하지 않고 소수인종 주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낯설게 하기, 타자화, 주체의 재구성 등을 천착해 들어가는 것은 미국 시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일임은 분명하다. 


넷째, 출판문화의 변화이다. 디지털 시대에 출판은 어떤 제도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시집과 출판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대형 출판사에 의존하기보다 소규모의 출판, 동인지 형식, 독립출판과 자가출판 등의 새로운 형식들은 시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이런 혁신은 시를 소비하는 독자 역시 새롭게 구성해간다. 이제 시가 단지 학술계의 엄격한 단상에 올라서 있지 않고 좀 더 현실적이고 생생한 개인의 경험과 사회문화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담아낼 토양이 형성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진정 시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인을 포함 우리 모두 쉼 없이 질문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앞서 언급한 언어 시운동을 위시한 시언어의 실험성에 중점을 둔 시 경향은 여전히 우세하다. 시 연구자이자 평론가인 마조리 펄로프는 관념 시운동을 주제로 한 2008년 애리조나 현대 시심 포지 움에서 각계각층의 시인, 교수, 연구자, 평론가, 편집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념시운동이 열어준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토론하고 공유했던 경험을 의미 있게 꼽는다. 관념시란 의례 시에서 기대되는 서정이나 감정 등을 배제하고 하나의 개념만을 강조한다. 시가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 보다는 선택한 개념을 언어나 다양한 문법, 표현으로 구성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관념시는 많은 논쟁과 비판을 양산하고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미국 시는 언어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문예지 <외지>에 실렸고 수록된 시 번역은 모두 필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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