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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베르 Jan 15. 2021

추락하는 농구공

주인 없는 농구공이 공원에 굴러다니길래, 농구를 좋아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농구공이 지면으로 추락하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슛의 농구공과 드리블의 농구공이 있다. 나는 두 농구공을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한다.

슛의 농구공에게 바닥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최종 목적지이다.

드리블의 농구공에게 바닥은 멀어져야만 하는 거부의 대상이다.


공을 던지는 선수의 생각은 다르다.

'슛의 농구공은, 바닥으로부터 멀리, 하늘 높이 올라 골대를 향해 날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드리블의 농구공은, 바닥을 향해, 선수의 손으로부터 적절한 강도로 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선수의 시야가 농구공의 시야와 같을 리 없다. 농구공이 바라보는 세상은 선수가 바라보는 세상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선수에게 슛은 중력을 극복해야 하는 행위이지만, 농구공에게 슛은 중력에 몸을 맡기는 행위이다. 슛의 농구공은 아무런 의지도 지니지 못한 채 외부의 힘에 순응하며 추락할 뿐이다. 그러나 농구공에게 드리블이란 중력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더 강한 힘으로 바닥에 추락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튀어 올라야 하는, 중력을 거슬러 다시 선수의 손까지 올라가야만 하는, 숭고한 과정이다.


슛의 농구공에게 추락은 비상(飛上)의 마지막 결과물이다. 추락이 끝난 농구공은 생을 마감한다.

드리블의 농구공에게 추락은 단지 첫 번째 시련에 지나지 않는다. 시련을 극복하고 튀어오를 때 비로소 그의 삶에도 꽃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추락들이 그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다. 추락과 튀어오름의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며 드리블의 농구공은 점점 강력해진다.


3년 전 폭염이 휩쓸고 지나간 7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간이 농구 시합 결승전, 동점인 상태로 마지막 세트가 끝나기 몇 초 전에 공이 나에게로 왔다. 드리블을 하자니 촘촘히 배치된 상대편 수비를 파고들기에는 역부족이요, 슛을 하자니 골대에서 너무 멀고 구석진 자리였다. 그렇다고 동료에게 패스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드리블과 슛,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한없이 연약해진 농구공은 골문을 향해 마지막으로 추락하였다. 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는 삶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비보(悲報)였으리라.


-2019년 5월 (초안) / 2021년 1월 15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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