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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완행열차

리스본 리스본으로

by 알버트

열차는 완행열차같아 보였다. 직행인 열차 시간이 한 시간이 남은 터라 정차역이 많은 기차를 선택할 때 역무원은 이 열차를 탈거냐고 거듭 물었었던 모양이었다. 여행할 땐 직통도 좋지만 이런 열차가 나는 좋다. 직통으로 가는 열차를 타면 1등석을 탈 수 있고, 타자마자 승무원이 날 찾아와 뭘 마시겠느냐고 친절하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제 할 일에 열중할 뿐이라, 그다지 즐겁지 않다. KTX 일등석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여기 기차 1등석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묘하게 닮았다. 사람들은 멀리 있어도 비슷한 환경에선 삶의 모습이 닮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랬으므로 내가 탄 열차가 완행이어서 좋았다.





새로운 역에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올랐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곳에서 예쁜 아가씨가 탔다. 객실을 다 둘러보아도 동양인은 나 혼자였고, 그건 리스본으로 오는 비행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후부터 누군가와 전화를 했다. 어지간하면 옆사람과는 눈인사라도 나누는 법인데, 바쁜 듯했다.


낮은 목소리로 하는 통화가 끝이 나지 않아 나는 이어폰을 찾아 노래를 들었다. 시끄러워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않고 내가 알 수 없는 말로 통화만하는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내가 내리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리스본에서 포르투까지 약 3시간, 기차시간이 정확하진 않은 듯했다. 더구나 기차의 종착역은 아니었으므로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할 수 없이 옆자리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을 가는 기차가 맞고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자기보다는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오리엔테 역에서의 그녀처럼 옆자리의 그녀 역시 출장 중이라 했고, 하는 일은 기계 디자이너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따 온 이름 같았다.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신이었고 내 생일 또한 사수자리, 그리고 그 이름의 로마식 혹은 영어식 버전이 다이애나였다. 우린 그녀의 이름이 신화 속 여신에게서 온 것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의 웃음과 눈을 보게 되었는데, 좀 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토록 순하고 선량할 수가 있을까 싶은 눈빛, 어쩌면 잘 통하지 않는 언어수준이 새침하게 군 이유였을까.





옆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어쩌면 나는 그녀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차에서 그녀가 내릴 때, 사람 아는 척도 하지 않은 그녀를 떠올리며 심지어 상처받는 소심함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녀가 내리는 곳까지 우린 각자가 하는 일과 가족들 그리고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급기야 사진을 나누는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나에게 연락하라는 인사를 남겼다. 물론 그녀가 정말로 그러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말문이 열린 그녀와 부지런히 대화중일 때 페이스북 알림 하나가 떴다. 아직 잘 읽지도 못하는 이름의 그녀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늦게나마 생일을 축하한단다. 나를 기억해서 아는척을 하는 그녀.


“나는 지금 리스본에 여행 와있어.”

“어 정말?” 나도 포르투갈에 와 있어. “

“진짜?”

“응, 브라간사라는 곳에 있어, 지금 공부 중이야.”

“우와 그렇구나, 정말 반갑다.”

“포르투갈에 왔으면 나한테 와서 지내도 돼”

“정말? 고마워 진짜, 지금 포르투 가는 길이야. 숙소는 다행히 정해놨어.”

“포르투에서 여기로 오는 버스가 있어.”

“가능하면 나도 널 보고 싶어. 일단 포르투 가서 상황을 한 번 보고 다시 연락할게.”

“오케이”

“연락할게~”


지난 6월 아르메니아 여행 때 시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어머니가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것을 도와주던 그녀와 어머니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보내준 뒤 온라인상의 친구가 되었다. 내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지 페이스북 상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긴 메시지를 남기는 것을 보았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단 말을 했었다.


가능하면 그녀를 보러 가고 싶었다. 옆의 그녀에게 물어보니 포르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간 만큼 올라가는 위치에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그녀를 만나러 가지는 못했다. 비행기 연착으로 이미 하루를 버린지라 포르투에서의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저녁에 그녀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녀는 나의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스페인에 갈 것인지, 바르셀로나에 갈 것인지.


“ 우와 정말 멋지다, 그럼 거기서 보도록 하자.”

“알았어, 갈 때 연락할게~”.

세상에나, 이렇게도 연결이 된다. 계획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린 크리스마스 즈음 바르셀로나에서 만나게 될 것이었다. 시간이 흘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낯 선 땅에서 잡은 약속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옆자리의 그녀는 교정 중인 치아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더니 출장지였던 코임브라에 내렸다. 그녀 역시 현재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어느 날엔가 문득 연락이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어느 낯 선 도시일 수도 있고, 멀리 떠나와 한국에서 그녀를 보게 될 수도 있겠지.


우린 어쩌면 알 수 없는 시간의 교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에게로 가고 그들이 내게로 오고. 여행을 떠나면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와, 보이지 않는 그들을 자주 잊는다. 그들 역시 나로부터 멀어져 있게 되었으므로 나를 잊게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지운 자리에 다른 사람들을 채운다. 그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어느 거리에서 지나치며 본 사람, 나에게 말을 건 사람, 내가 길을 물어 본 사람과 기차를 기다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사람 또 기차칸에서 제법 긴 시간을 이야기한 사람들을 숨겨둔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로부터 가난해질 때 길을 나서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코임브라에 내 몫만큼의 그녀를 담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마음 속의 그녀를 둔 것처럼, 그녀의 마음 속에도 내가 있으리라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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