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Marburg, GERMANY
죽을 것처럼 답답하고 덥던 하루가 등을 돌리고 사라져 가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썩한 사람들의 발자국 뒤에서 바람이 따라온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숙소에서 뛰쳐나와 여기 길거리에서 자고 싶은 심정이다.
며칠 째 38도를 웃도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공기가 뜨거워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덥고 땀난다고 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이 여기서는 드물다. 작년 2월과 7월, 그리고 올해 7월 독일 Marburg에 세 번째 왔고, 늘 그렇듯 마부룩 대학교에서 심리운동 연수중이다. 지난여름 여기서 지냈던 시간이 있지만 나에겐 많은 것이 새롭다. 발목에 금이 가는 바람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 신세로 살았던 시간이어서 그럴 것이다. 다칠 것을 예견한 것처럼 그날 밤 운명처럼 교수님이 도착하셔서 돌봐주지 않았다면 연수를 포기하고 귀국했어야 했을 것이다.
번역출판팀, 학술지팀, 사과나무 아래에서 가졌던 시낭송팀, 연구소팀 그리고 마부룩에 계시는 교수님과 조교선생님께 식사 대접을 했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마무리하고 있다. 9월 국제학술대회에서 교수님을 만나게 되기는 하겠지만, 동시통역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은 다음 주면 마무리될 것이다.
유일한 피서지 대학교 신관 도서관에 앉아 문득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살인적인 더위를 무릅쓰면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 “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안에서 흔들리는 부표처럼,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 것이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일까?”....... 그러다 메모장을 펼쳐 기록하기 시작했다.
'편집팀 일 그만둘 것
학술지일 그만둘 것
연구소 일도 그만둘 것
하릴없이 타인을 챙기는 것도 그만둘 것.......
그리고
상담센터 활성화시키고
웹사이트를 정비할 것.
나의 공간을 마련하고, 나의 영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자. 글쓰기, 사진, 여행, 상담과 컨설팅 그리고 학교와 교사들....... 학교를 떠나 살고자 했던 그 마음을 다시 만나자'.
돌이켜보면 나를 잊고 산 시간이 너무 오래다.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도 쓸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시간은 무서운 기억이다. ‘내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살고자 했던 모습으로, 내가 최고로 잘하는 일을 매일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며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나답지 않은 것들을 걷어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고, 가장 나다운 모습,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대상 속에서 나를 물 주고 가꾸어 꽃피게 해야 한다고 다시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아주 다른 독일의 문화. 더워 들어가면 어디든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곳은 정말 몇 곳 되지 않는다. 새로 지은 이 도서관에 에어컨이 시원하다는 소릴 듣고 들어갔지만 불과 1시간이 되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면 나왔다. 차라리 해 지고 나니 바람이 슬슬 불어오기 시작하는 도서관 앞 여기가 낫다. 가로등 아래 랩탑을 펼치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이 시간이 이 상황에선 가장 시원하게 밤을 보내는 방법이다.
방을 따로 쓰지만 연수팀과 같은 숙소에서 묵는다. 이 번이 세 번째로 마지막 연수이다. 대부분은 처음 아니면 두 번째 참가한 연수, 나이로 보나 여건으로 보나 나는 이들과 많이 다름을 느낀다. 아니 어쩌면 이들도 분주함과 어울림 속에서 외로움과 소외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체로 지내는 연수를 세 번 경험하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나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된다.
밤 12시면 도서관에 불이 꺼지는지 궁금하다. 내일 저녁엔 담요를 가지고 나와야겠다. 내일 새벽에 성에 오르고, 좋아하는 몇 장면은 기념으로 가져가리라. 숨 막힐 듯한 공기를 밀어내는 바람이 불어 행복하다.
부디 내 방에도 이런 바람 찾아오기를.
덧글:
번민 가득한 마음과 더위와 신체적 피로에 지쳐 도서관 옆 가로등 아래서 한 동안 놀았더니, 다른 이의 눈에는 이렇게 읽힌 모양이다. 페북 글 읽으며 웃음이 났다. 나였다고 말해주었더니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