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나의 아이들

지난 시간 속에서

by 알버트



새 학년이 되어 학생들과 만난 지 2주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교사들은 아이들의 성격적 특징, 학습태도와 뚜렷이 드러나는 습관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한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삐딱하게 앉아 나를 째려보던 녀석이나, 옷깃만 스쳐도 고함을 치던 녀석이라 할지라도 담임이 된 지 2주 정도가 지나면 내 학급에서 적용되는 룰에 익숙해졌고, 그렇게 큰 사고 없이 일 년을 지냈다. 그러나 그 해 3월에는 새 학급을 맡은 후 2개월이 지날 때까지도 나는 고전 중이었다. 5학년 담임 전문이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여러 번 5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무색할 정도로 내 학생들은 이전에 만났던 아이들과 결이 달랐다. 때때로 선생님들이‘이번 학년 아이들은 어떻다’는 식의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란 선생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은 성인이 아니므로 아직은 부모와 교사 같은 어른들이 그려주는 대로 변해가는 그림 같다고 보아서였다.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들이 했던 말이 아이들의 이런 면을 이른 말이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 해 학생들과 지내는 하루하루는 놀랄만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깜짝깜짝 놀랄 모습이 학급 여기저기에서 벌어졌다. 점심시간 후, 책상 위에 있는 아주 작은 김이나 휴지 한 조각 때문에 친구와 책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2주 사이에 대 여섯 번 일어났다. 친구와의 몸싸움을 그만두도록 중재하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일도 여러 번이었다. 장난을 건 녀석은 슬쩍 빠진 자리에, 상대 탓을 하며 안경을 땅에 던지고 밟으며 나뒹구는 아이들도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싸움이 그토록 일어나기 쉽다는 것을 그 해 내 반 아이들을 보면서 알았다. 담임 선생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경험상 학생들은 학기 초에는 두드러진 문제 행동을 덜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새로운 조직에서 구성원들을 파악하고 관계를 맺느라, 학급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결정하고, 허용되는 규칙의 범주를 파악하느라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해 약 서른 명의 내 학급 아이들 중 여섯일곱은 그렇지 않았다. 녀석들은 자신의 감정에 너무 충실했다. 화가 나면 참지 못했고, 친구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자기의 입장을 말로 정확히 전달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니 다툼을 할 일이 생기기만 하면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특히 남학생들이 감정과 분노 조절이 잘 되지 않고 충동적으로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친구를 배려하거나 이해하려는 모습 또한 보기 힘들었다.


2주는커녕 한 달이 지나도록 변화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했다. 덤덤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어도,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학생들에게 지금까지와 다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어떻게 가르칠지,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고민스러웠다. 씩씩대는 아이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어떻게 조금 덜‘욱’하게 유도할까 싶어 초조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학급생활을 해왔는지 당시로서는 궁금했던 게 진심이었다.


교실에서 선생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매일 차고도 넘쳤다. 몇몇 아이들이 보이는 돌발적인 행동은 학급 친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광경은 아이들에게 불공평한 일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는 동안 의도하지 않은 환경에 놓이는 경우가 있지만, 또래 친구들의 다듬어지지 않는 분노를, 가까이에서, 자주 접하는 일은 12살 아이들의 인생에서 볼 때 그다지 멋진 행운은 아니었다. 교사인 나 또한 학생들에게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 문제적 행동이었지만 몇 녀석은 한 달이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았다.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다행히도 녀석들은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점차 학급 문화에 익숙해지는 듯 보였다. 흥분하지 않고 말해도 귀 기울이는 어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하려는 말이 선생님에게 왜곡 없이 전달되고 공평한 처사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이들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주먹질을 하거나 화내는 대신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고, 분노를 터뜨리거나 화를 내는 경우가 줄었으며, 보다 덜 공격적이고, 조금 누그러졌고, 행동보다는 말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내가 퇴직한 뒤로 몇 달 동안, 학원을 오가면서, 나에게 문자와 전화를 하던 녀석은 그중에서도 단연 싸움꾼이었던 녀석이었다. 몇 년의 학교생활 동안 억울한 일을 자주 당했던 그 녀석은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해 싸움을 일삼았지만, 나중에는‘화가 난다’고 말하면서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하던 아이였다. 녀석이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예전 같은 상황에서도 화를 잘 참고, 불같은 행동보다는 말로 표현하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에게 하려 했던 내 의도가 반영되는 것 같아 기뻤다.


학생의 말, 특히 학교에서 문제적 행동을 하는 아이로 낙인찍힌 아이의 말을 진심을 다 해 경청하는 일은 그 아이를 다른 아이처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제자가 말했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생각했어요”. 아이와 한 번, 어머니와 두어 번의 상담을 했을 뿐이었지만 그 시절의 제자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었다. 그 당시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 존재를 응시하며, 자신이 하는 말을 편견 없이 들으려는 태도, 그 속에서 자신의 평안을 진심으로 바라는 모습을 느끼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체로 걱정스러운 일들을 하지 않았다.


학생을 가르쳐야 할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것은 어쩌면 교사가 할 일이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학생의 특정 행동이 자신을 괴롭힌다면 아마도 그 아이를 보는 자신의 시각이나 태도에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사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그 학생 역시 비슷한 행동으로 반복되는 문제로 교사 앞에 설 수 있다. 교사가 학생들이 일으키는 문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아이들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상황을 조율하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일은 상황의 흐름을 바꾼다. 한 발자국 떨어져 학생을 지켜보며, 그 행동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을 조금 바꿔보면, 그 아이가 달라지는 신기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교사는 학생의 행동이 개성으로 봐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함께 어울려 그 개성이 꽃 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하고, 개선이 필요하다면 단호하게, 지속적으로, 절제된 감정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자신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 아이에게 분명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다치거나 어려움을 겪을까 봐 염려하며, 아끼는' 누군가가 학교에 있다는 사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을 학생이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교사에 대한 아이의 믿음`과 `아이에 대한 교사의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