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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Sep 19. 2019

증거를 숨긴 사람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증거를 찾는 소설이다.

사람에게 아픔이라는 것은, 상처라는 것은, 또 시련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증거가 많은 사람일수록 삶에 대해 확신이 생기기도 하고, 도리어 반대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라 의심이 커지기도 한다. 그런 확신과 의심은 다시 사람을 병들게 하고,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증거를 새긴다.


처음으로 한강을 읽던 날, 이 작가는 왜 이렇게 아픈지, 그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예수가 세상의 어린양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손과 발이 묶여 얇은 살을 골라 만져 뼈를 피해 못이 박힐 때의 아픔이 생각났다. 느껴본 적이 없어 공감할 수 없는 처절함이었다.


한강은 내가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앎에도, 굳이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글로써 적어낸 인간의 아픔, 상처, 시련의 증거는 처음부터 ‘네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 잘 알고 있다’는듯 우아하게, 혹은 상관 않고 그려낸다. 나는 닿을 수 없는 무대 위의 발레를 바라보는 관객이 된 것 같다. 작가는 이 발레의 연출자겠지. 그럼 나는 이 발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닿을 수 없는 거리감에 답답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읽는 내내 무력감도 엄습할 수 있다. 그러니까 조심스레 보고, 잘 읽어야 하며, 조용히 읽어야 한다. 그러면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상처 혹은 아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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