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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Feb 25. 2020

벽 위의 사람, 벽을 만지는 사람, 벽에 부딪힌 사람

문유석, 『 미스 함무라비 』

문유석의 『 미스 함무라비 』는 벽 위에 선 자 징징거리는 소설이다.


설날 풍경의 기억 하나, 어른들이 점심을 드신 후 안방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작은 삼촌의 아내, 그러니까 집안 막내며느리가 짙은 밤색 소반을 들고 왔다. 그 위에는 먹기 좋게 깎인 사과가 쟁반에 가득 놓여 있다. 중앙에 소반을 조심히 둔 막내며느리는 어디로 나갈까 머뭇거린다. 이내 한 귀퉁이에 어색하게 앉은 작은 삼촌이 양반 다리 한쪽을 살짝 들어주자 그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갔다.


할머니 말곤 온통 남자의 공간에서 나도 짐짓 어른인 양 앉아 있었다. 그때 어른들이 나누던 이야기는 아랫마을 누가 소송하고 있는데 고생하고 있다며, ‘집안에 법하는 사람과 한의사 한 명은 있어야지’ 않겠냐는 대화였던 것 같다. 법 다루는 사람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다. 그때 방 건너 부엌에서는 밥 차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 이모들과 집안 막내며느리가 먹을 점심상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다지 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아쉽겠지만. 법과는 거의 관련 없는 직업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고소장을 하나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소 경고장이다. 바빠 잊었던 연체 통신요금의 납부를 재촉하는 문서였다. 금액은 약 8만 원, 대략 석 달 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고소라는 단어에, “그게 얼마라고 고소를 하네 마네야!”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별다른 수 없었다. 그 길로 바로 은행으로 향했고, 수수료 1,300원을 내며 타행이체했다.


상상해봤다. 만약 1,300원이 1,300만 원으로 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불안감은 말도 못 할 것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금액만 들어도 ‘어쩌나’ 싶다. 소설에서 보니 이 정도는 소액 사건에 속하던데, 그 지경이 된다면 대책도 없다. 이미 빚쟁이인데.


법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법이 내 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고소의 두려움은 고소를 다루는 법관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말하던 ‘법 다루는 사람’이 떠올랐다. ‘법 다루는 사람’이 한 명 알았으면.


법은 벽이다. 넘어본 사람과 만져본 사람만이 벽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막혀본 사람은 절망하고, 벽을 올라본 사람은 벽을 우습게 본다. 자주 넘어보면 넘기도 쉽다. 그렇다면 법관은 벽을 세우는 사람일까, 벽을 무너뜨리는 사람일까? 확실한 것은 벽은 단단하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물음. 벽을 세우는 법관도 단단한 사람일까?


<미스 함무라비>의 법관들은 적어도 법만큼 단단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참지 못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조심했다 ‘저들은 법을 다루는 사람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척해도 다른 인간이라고. 내가 무서웠던 고소를 주무르는, 우리와 다른 인간들’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법정에서 법관 자리는 여전히 저 위에 있다. 권위 위에, 사람들 위에, 법 위에 존재하고 있다. 거기에 법관이 앉아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미스 함무라비>는 징징거림이 아닌가 싶다. ‘우리 그렇게 모진 사람들 아니랍니다.’라고. 누가 누구에게 징징거리나 싶지만, 이 징징거림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더 이상 보자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고, 캐리어를 끝고 다닌다는 말에 조금 웃기까지 했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 여행 가는 기분일까 묻고 싶었다. 마침 징역 1년 판결에 욕설로 항의한 피고인을 다시 불러내 3년으로 높여 선고했다는 법관의 기사도 읽었다. <미스 함무라비>에서 보았던 법관의 사람됨을 느낀다. 그게 권위든, 뭐든 욕하니까 기분이 나빴다는 말이니까. 적어도 우리 세상 속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어이없다면 저들도 어이없겠구나, 우리가 답답하면 저들도 답답하겠다 싶은, 같은 사람됨의 동질감.


법 앞의 평등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법 앞에서만 평등하다. 법 뒤에서는 물론, 법 아래서, 법 위에서는 절대 평등하지 않다. 그래서 법은 눈을 가졌고, 법관의 법의 안경이구나 싶다. 안경이 초점이 잘 맞을수록, 깨끗이 닦여 있을수록 전방으로 잘 볼 수 있을 것이다.(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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