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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러 Feb 24. 2024

여기 내 마음을 보세요

에필로그; 나의 우울증에 대한 마지막 글

"예전보다 마음이 단단해지셨어요. 느낌이 그래요."


이제 누구에게든 내 속마음을 꺼낼 수 있다. 한동안 힘들었다고, 그래서 우울했다고, 사람들을 원망했다고, 많이 서운했다고, 죽고도 싶었다고, 용기도 없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때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가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때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암담했던 마음을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난다. 추억은 가당치도 않다. 끔찍했던 나날들.


매일 소설 속 주문을 외며 잠든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정신을 죽이며 두려움은 소멸을 가져오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을 맞서 흘려보내리. 두려움이 지나가면 마음의 눈으로 그 길을 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이 나만 남으리.


내 우울을 잊고 싶지 않았다. 매일 떠올려 옆에 두고 했다. 멀리 보내버리면, 언젠가 또다시 날 찾아올까 무서웠다. 참 우습다. 우울하고 싶지 않아서 우울하려고 했다. 매일 조금씩 고통받는 게 나았다. 또 어느 날 절벽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또 그 심장을 쥐어짜는 손아귀에 잡히고 싶지 않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온갖 고통이 들어있었다지. 질투와 시기, 슬픔과 분노, 불만과 좌절, 불안과 두려움, 증오와 후회, 열등감과 괴로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상자 안에 있었다고 하지. 판도라 때문에 큰일 났네. 저 무시무시한 것들이 다 세상에 나와버렸네. 세상을 이리저리 휩쓰네. 사람을 흔드네. 재앙을 불러오네. 


그런데 상자가 뭐가 있네. 뭐 하나가 남아있네. 무엇이길래 남았을까. 얼마나 무거운 고통이길래 날아가기도 못하고 상자에 남아있나.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건 희망이더라.


곧 변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잊고 싶지 않아도 잊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것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런데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지금의 너는 그때의 네가 다르니까 꼭 잘 견뎌내고 앞으로 뭐든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희망이 참 싫었다. 왜 희망이 그것들과 같이 있었을까 의심했다. 그래서 희망 역시 고통의 한 종류일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싫었다. 살면서 품으려고 하지 않았다. 희망한다면 그냥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희망해서 무엇하냐고. 희망도 고통이니, 고통을 품지 말라고 함부로 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달리 생각한다. 판도라의 상자는 마음 그 자체다. 희망은 저것들에게 눌려 있었던 거다. 판도라는 실수로 고통을 세상에 퍼뜨린 게 아니다. 일부러 마음이라는 상자를 열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준 거다.


여기 내 마음도 우울을 들춰보니 희망이 저기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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