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리서치 해야하면 무작정 검색부터 했는데
가설과 전략을 먼저 설정하는 게 중요하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자료 찾을 때마다 급해서 마구잡이로 검색해보기만 했는데...
뜨끔하네요. 한 번 따라서 해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퍼블리 저자가 되었다. 대학원을 탈출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다. 물론 대학원이야 말로 '텍스트 콘텐츠 생산'의 왕도를 달리는 곳이고 토론 강사로 일한 기간도 있으니 '콘텐츠'를 만드는 감각을 익혀온 시간은 더 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의 현장에서는 '어느 회사에서 몇년 일하셨어요?'라는 질문이 다른 경력을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월급 받고 일한 기간만 따지면 그정도가 된다.
퍼블리 저자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 동료가 '알벗은 학습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한번 회사 전체회의에서 인사이트를 공유해주시면 어때요?'라고 물어온 것이 계기가 되어 썼던 브런치 글 일하는 사람의 공부법을 다듬으며 '한번 퍼블리에 기획서를 내볼까?'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완성된 초안이 있어서 기획서를 작성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고, 빠르게 퍼블리에 보냈다. '독자의 페인 포인트가 명확한 것 같다'는 평을 받았고, 편집 작업이 시작되었다.
'퍼블리 저자가 되는 일이 이렇게 쉽다고? 이제 글 쓰는 일만 남았네?'라는 것이 그 때까지 나의 생각이었다.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과정을 즐긴다. 이미 있는 아이디어들의 점을 연결하고 맥락을 바꿔 빈 공간을 발견해 새로운 가능성을 그리는 과정이 너무 재밌다. 문제는, 위험한 곡예를 통해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다음날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에는 똥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아이디어를 글이나 콘텐츠로 구현하는 단계에서 머리에 쥐가 난다는 것이다.
참고할 콘텐츠, 이론, 개념, 사례 등을 나열한 기획서는 항상 다음 단계에서 뒤로 밀린다. INTP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 기획 단계에서 충분히 깊고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다. Go big or go home의 모드에서 일단 야심차게 질러놓은 거창한 기획안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주어진 시간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거나, 실제로 붙여 넣은 살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할 단점이다.
아이디어 검토 단계를 끝내고 콘텐츠를 발간하자는 메일이 왔던 것은... 놀랍게도 지난해 11월26일이었다. 오늘 콘텐츠가 나왔으니 거의 3개월이 걸린 셈이다. 퍼블리측의 메일에서 통상적으로 콘텐츠 발행에 소요되는 시간이 8~10주라고 했는데 약간 더 오래 걸렸다. 중간에 미루기procrastination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보내버린 시간이 약 2주 정도였으니 퍼블리의 추산은 놀랄만큼 정확했다.
다양한 경력을 거쳐 다시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고 있고, 앞으로 스타트업 / 사회혁신 / 뉴미디어(콘텐츠)라는 키워드가 겹치는 어느 공간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고자 하는 나는 이번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돈받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을까?
퍼블리에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브런치나 미디움 등,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글을 써보고자 하는 분야에서 좋은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 플랫폼도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건, 내가 아주 세밀한 페인 포인트를 잡아 독자로서의 나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글을 찾을 때까지다.
콘텐츠 디렉터로 일하며 나는 '일하면서 배워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을 겪었다. 문제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을 알면 더 나은 전략과 방법을 택할 수 있다. 다른 누군가가 쓴 콘텐츠를 참고하기보다는 야마구치 슈의 책 <독학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를 참고해 나만의 방법론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디자인 씽킹을 활용해 프로세스를 디자인하고 도식도 만들었다.
내가 직접 겪은 문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의 현장에서 끌어올린 해결책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한 콘텐츠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내 문제가 진짜 문제였고, 같은 구조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겪는 어려움이었고,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내가 진지하게 고민해 '나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법론'을 만들어냈다면,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도움이 되는 콘텐츠가 나온다.
내가 이전에 쓴 글 "첫 출근을 앞둔 당신에게"도 유사한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직 과정의 불안감에 첫 출근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웹을 계속 검색하던 나는 '첫 출근을 앞둔 사회 경험이 부족한 직장인'이 어떻게 불안감을 관리하고 유의미하게 시간을 보내 도움이 되는 준비를 할지 가이드해주는 내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겪는 문제라면, 다른 사람도 겪는다. 내가 도움 되는 콘텐츠를 찾지 못했다면, 아직 없다는 거다. 그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찾은 실마리를 글의 형태로 풀어내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좋은 콘텐츠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겪은 문제를 다른 누군가는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나는 자비이자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 마음이 글로 구현된 것.
이쯤되면 문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변혁시킬 수 있다. 내 문제는 내 노력으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창이다. (내) 문제는 (타인의) 기회다.
야마구치 슈는 다른 책에서 '문제 해결의 시대에서 문제 발견의 시대로 변화했다'라는 말을 했다. 뻔하고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솔루션들이 피터지게 경쟁하고 있다. 그런데 스타트업이나 사회혁신 분야에서는 이제 미래지향적으로 문제를 찾기만해도 속도 경쟁에서 훨씬 앞서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지점을 찾아내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비즈니스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경험을 기획하는 기획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찾아나서는 것이 앞서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진리를 이 기회에 배운 셈이다.
이번 출간 과정이 조금 어려웠던 것은, 일의 현장에서 얻었던 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하는데 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같은 일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같은 문제를 맞이해 같은 방법론을 반복하고 있는 내가 문제를 포착해 해결했더라도, 빠른 속도로 직관을 활용했던 그 경험을 이야기로, 하나의 논리적인 프레임워크로 풀어내는 일은 기록, 반추, 고민을 필요로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핵심이 아닌 것들이 관여한다. 플랫폼에 글을 써서 발행하는 일이 마치 나의 명성을 높여주는 일인 것처럼, 그 과정에서 돌아올 수 있는 수익이 중요한 것처럼, 본래 자비와 사랑이었던 것이 더 저급한 어떤 것으로 바뀌어버리며 동기도 떨어지고 메시지의 핵심도 흐려져버린다. '(나의) 문제는 (타인의) 기회다'는 진리가 퇴색되고 새벽의 부엉이가 숨어버린 시간, 노이즈가 높아지고 괜히 생각도 복잡해져 진도가 나가지 않게 된다.
핵심은 문제 상황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고 페인 포인트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문제를 세세하게 기록하는 과정, 가상의 스토리로 그 감정 경험을 담아내는 일, 브레인스토밍과 도식화로 솔루션의 아웃라인을 잡는 방법 등 모든 단계를 머리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느 순간 머리 속에 질문이 사라진다면 전략도 방법론도 도식화도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질문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어야 뇌는 작동한다. 적어도 내 뇌는 그렇다.
첫 기획서가 생각보다 쉽게 통과한 일을 경험하며 둘째 기획서를 써서 보냈다. 역시 페인 포인트가 명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아이데이션을 이어가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상은 현실을 박차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내가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올까? 플랫폼의 콘텐츠와 콘텐츠 마케팅이 알아서 돈을 벌어주고, 나는 강연, 글쓰기, 책 출간 등으로 수입을 얻으며 '남의 돈을 받아 책읽고 글쓰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성급함이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 목적은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정말 내가 시간을 충분히 쓸만큼 중요한 문제를 발견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가 성공한 만큼 사회와 타인에게 환원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내 삶의 의미다. 이 과정에서 전략, 브랜딩, 수익화 등이 모두 중요하겠지만, 삶은 언제나 내가 핵심을 놓치면 머리를 내려칠 쇠망치를 등 뒤에 들고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다.
지난 몇달간 부침이 심한 흐름과 파도를 경험하며 다시금 느낀다. 선햔 의도가 마음 속에 충만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자비의 달성이 될 수 있도록 일상을 설계해야 계속 파도를 탈 수 있다. 성급하게 성공을 바라면 바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다시 길을 나서며 질문을 되새겨보자.
내가 겪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 문제는 해결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가?
내가 해결한만큼 사회와 환원에게 그 지혜와 성과를 되돌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 속에 자비와 사랑이 따뜻하게 자리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