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애벌레는 고통스럽게 껍질을 벗고 눈부신 나비로 성장한다
1. 눈치 없는 책벌레
‘성장’이라는 단어는 버겁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공부해야 할 것들은 많고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같이 많다. AI를 비롯한 각종 신기술과 더 효율적인 삶을 위한 앱들은 날마다 늘어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가끔 글 쓰는 일에 지칠 때 기분전환을 위해 꼭 노래를 듣는데, <성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바로 이달의 소녀가 부른 <butterfly>가 떠오른다.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몸집이 커져서 번데기로 잠시 멈춰서 있다가 눈부신 날개를 펼치는 나비가 된다. 나 또한 소위 ‘눈치 없던 책벌레’였던 고등학생 때부터 조금씩 성장과 동반되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많지 않았던 나는 책의 세계로 피신했다. 하지만 정말 공부를 하거나 친구와 사귀어야 할 시기에도 나는 좋아하는 책이라면 꼭 끝까지 다 읽어야만 했다. 살짝 시큼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풀풀 나는 도서관의 서고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와이셔츠 같이 뽀얀 새 책들이 나에게 손짓하는 서점은 나에게 마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고맙게도 다양한 책을 접했던 경험은 내가 학교에서 에세이 숙제와 영문학 수업을 들을 때 유용하게 쓰였다. 스스로를 말과 행동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보호하지 못했지만 선생님들이 내가 쓴 글에 대해서 칭찬을 해줄 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든 세계 속에서 내가 갇혀서 타인에게 먼저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당연히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2. 책벌레는 불나방이 될 뻔했다
대학생이 되어서 깨달았던 사실은 우선 내가 ‘눈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고 타인의 입장에서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불나방처럼 자신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가로등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타인의 인정과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내가 정말로 잘못한 것이거나 눈치 없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차려 주지 못한 것이든 전부 똑같이 ‘나의 실수’로 취급을 받았다. 결국 뜻하지 않게 오해를 사기 싫어서 항상 몸을 움츠리고 다니면서 모자로 내 얼굴을 감추고 다녔다. 자주 깊은 생각에 잠겨 혼자서 터벅터벅 걸으며 캠퍼스를 헤매고 다녔다. 그나마 항상 조별과제를 같이 하며 어울려 다녔던 네 명의 친구들도 나보다 일찍 졸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이러니 나의 연애 또한 김칫국을 연속으로 마시는 구구절절한 짝사랑 이야기뿐이었다. 누군가와 달달한 캠퍼스 커플이 되거나 강남역에서의 소개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원하는 대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추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나는 그 아이돌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현생에 나와 만날 일이 없기에 사귀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부담감 없이 내가 낸 돈만큼 그저 무대와 음악, 조명, 그리고 퍼포먼스에서 나오는 도파민에 취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불나방이 내 날개가 타버려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아이돌의 앨범과 굿즈를 사고 종종 이벤트 장소를 따라가서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나만 좋아하면 되니까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대학생 이후의 짝사랑도 딱히 잘되진 못했다. 나는 20대 동안 여기저기 거주지를 옮기며 살아야 했기에 누군가를 깊게 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딱 한 번 용기 내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해보았지만 당연히 실패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가서 자신 있게 나를 어필하지 못했다. 또한 내 주변 사람들이 정말 쉽게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3. 끝없이 탈피하는 번데기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내 삶의 행복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또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기도 했으나 우선 나라는 사람을 잘 알아가고 보듬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내가 아닌 내 지인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패턴이 반복되었기에 그 충격이 컸었다. 그 충격에 누군가를 함부로 탓하거나 나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책에서 알게 된 것들은 도움이 되기도 했으나 실제와는 다르기도 했다. 직접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참 많았다. 다행히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들은(성경을 제외하면) 주로 심리학 관련 서적들이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나니 좀 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덜 힘들어졌다. 내가 보는 책도 점점 다양한 종류의 책을 보게 되었다. 흥미 위주의 만화책과 소설책보다는 문학, 사회학, 예술 등 좀 더 깊은 구조의 세상에 대해 차근차근 이해하며 익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익힌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순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한 마음, 혹은 정신력이 몸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했다. 우선 집 근처 헬스장을 주기적으로 열심히 다니며 조금씩 체력을 길렀다. 건강한 식재료 위주의 식사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노력하는 나에게 무작정 보상을 해주기보다는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힐 수 있었다.
4. 언젠가 진짜 나비가 될 때
사실 4년 전에 결혼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쉽지 않다. 3년 전 엠넷
<퀸덤 2>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달의 소녀는 너무나 아름다운 퍼포먼스와 함께 <Butterfly>를 선보였다. 이후 선보였던 무대들까지 전부 호평을 얻었으나(빌보드 200 차트에 진입하기도 했었다!) 멤버들은 현재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소속사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소녀들의 활동을 계속 응원했던 나 또한 남편과 즐거운 결혼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때때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달의 소녀는 <퀸덤 2>의 ‘Butterfly’ 무대에서 <밤이 되면 나비의 눈이 가려지지만, 아침을 향해 날아가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서사와 완벽히 어울리는 퍼포먼스 덕분에 확실히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한 무대에서 열두 명의 소녀들은 쉬지 않고 춤을 추며 날아올랐다. 나 또한 예전보다 덜 울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집안일, 독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주일학교 봉사, 책모임까지 하고 있다. 사이버대학에 재입학을 신청해서 3월부터 다시 수업을 듣기로 했다. 소녀들과 소녀들을 응원하는 나의 진짜 날갯짓은 지금부터라고 믿는다.
시작은 작은 날갯짓, 이제 내 맘의 hurricane
Been, been there, never been, been there, 세계가 점점 작아져 가
데려가줘, way too far (way too far), 새로워져
이 순간 dreams, dreams may come true
넌 마치 fly like a butterfly
날 멀리 데려갈 wings, wings
이대로, fly like a butterfly
귓가엔 바람 소리, wing, wing, wing (이대로)
난 닿을 듯해, I better be around you
https://www.youtube.com/watch?v=aXaHB4gGAys-출처: Mnet KPOP채널
2021년 멜론에서 선정한 케이팝 명곡 100곡에서 이달의 소녀 ‘Butterfly’는 69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SM에서 일했던 정병기 프로듀서가 프로듀싱한 그룹이어서 확실히 미감에 대한 컨셉을 잘 잡은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또한 제가 이달의 소녀를 맨 처음에 알게 해 준 곡이기도 합니다. 한창 코로나가 심했던 시기에 이 노래를 자주 들으며 산책을 했었습니다. 노래에 못지않게 멋진 안무가 담긴 뮤직 비디오를 보고 저 또한 아름다운 나비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었습니다. 지금도 헬스장에서 러닝 머신 위를 달리면서 이 노래를 자주 들어요. 이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달리다 보면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제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