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10살 강아지와 함께한 빛나는 600일
나는 강아지를 키우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프리랜서라 강아지와 함께 할 시간이 많고, 나 혼자 쓰는 작업실이기에 출퇴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예전부터 강아지를 좋아해서 강아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간과했던 문제점이 존재했다. 바로, 강아지를 영상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개는 훌륭하다’ 등의 매체를 통해 강아지를 보고 배우다 보니,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케이스들이 매우 특이하고 반드시 고쳐야 하는 문제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강아지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지금은,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문제견'들이 사실은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경우의 변형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솜이와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는 실제 경험이 많지 않고 지식만 있을 때였다. 그래서 TV에 나왔던 행동이 다솜이에게서 보이면, 화들짝 놀라며 어떻게 하면 '문제행동'을 고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지곤 했다.
특히, 다솜이는 (후에는 좋아졌지만) 산책 시 줄을 당기며 제멋대로 뛰쳐나가려 했고,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강아지를 보면 심하게 짖고 달려들려 했다. 물론, 정도에 따라 고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다솜이의 이런 행동들은 여느 말티즈라면 나타내는 흔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한동안 나는, 말티즈 특유의 성격이나 다솜이의 전후 사정 등을 고려하지 않고, 짖고 달려드는 행동들을 '고쳐야 하는 나쁜 습관', '훈련받아 마땅한 문제행동'으로 규정해 버렸다.
TV에서 배운 대로, 다솜이와 산책을 나설 때면 집 앞 주차장을 왔다 갔다 하며 흥분도를 낮추려 하고, 멀리서 다른 강아지가 보이면 간식을 주며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영특한 다솜이는 '앉아', '손', '엎드려' 등의 개인기는 하루 만에 마스터하면서도, 산책 시 나타나는 행동들에 대한 교정은 전혀 소용이 없어 보였다. 내심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잘 교육된' 강아지를 원했던 나의 한숨도 늘어갔다.
강아지에 대해 또 한 가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 바로 강아지의 '감정'이다. 나는 강아지가 이렇게 섬세한 감정을 지녔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다솜이와 함께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무렵, 피부병 때문에 빡빡 밀었던 털이 보송보송 자라나고 휘청거리던 걸음도 점점 빨라져서 다솜이의 자신감이 한껏 높아지던 때였다. 그리고 '다솜이는 문제행동을 가진 문제견'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날도 두둑이 아침을 먹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다솜이의 네 발이 가볍게 통통거리고 작은 귀가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신난 발걸음이 다솜이의 설레는 기분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신난 다솜이와 걱정 가득한 내가 빨간 리드줄 양끝을 팽팽하게 맞잡고 공원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섰다. 그때 골목 맞은편으로 작은 치와와와 인자해 보이시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치와와는 종종 걸으면서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발을 맞추어 걷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멈추면 옆에 멈춰 섰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 그제야 발을 뗐다. 골목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으며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아주머니와 연결된 줄은 느슨한 곡선을 유지했다.
멀리서 치와와를 발견한 다솜이가 짖기 시작했다. "야!! 이 쪼꼬만 치와와야! 여긴 내 구역이거든?? 얼른 썩 꺼져버려라!!!"
침을 줄줄 흘리며 동네가 떠내려갈 듯 짖는 다솜이를 본 치와와는 잠시간 우리를 빤히 쳐다보더니, 가자는 신호를 보내는 아주머니 뒤를 따라 유유히 골목을 떠났다.
다솜이의 목소리로 가득 찬 골목에는 나와 다솜이만 남겨졌다. 나는 왠지 모를 부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바랐던 느긋한 산책! 얌전한 강아지! 나도 모르게 그만,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야 말았다.
"다솜아, 봐봐! 저 강아지는~ 친구를 봐도 짖지도 않고 얌전히 잘 기다리잖아. 저렇게 다른 강아지를 봐도 짖지 않고 눈으로 인사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착하고 예뻐~? 저 치와와는 정말 착하다. 산책의 본질이 뭔지 아는 강아지야! 너도 여유 있게 걸으면서 이 경치를 즐겨봐! 혼자서만 앞서 걷지 말고~ 누나랑 보폭을 맞춰서 걸어야지! 저 치와와 좀 보라니까? 아주머니랑 한 팀처럼 걷고 있잖아. 얼마나 보기 좋아! 정말 착하고 예쁜 치와와다~! 어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짖고 빨리 걷는 게 능사가 아니야. 이 골목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고~ 치와와 좀 본받아봐!"
무슨 생각이었는지, 공원으로 가는 100미터 남짓되는 짧은 골목을 걷는 동안 '그 치와와'와 비교하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때 만약 다솜이를 클로즈업해서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었다면, 다솜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그대로 녹화되었을 것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따발총처럼 다솜이의 흰털 사이사이에 콕콕 박혀, 다솜이의 작은 몸을 무겁게 했다. 덩달아 신났던 기분도 물을 먹은 듯 축 쳐지고 말았다.
내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공원에 도착한 이후이다. 골목길까지는 통통거리며 잘 걷던 다솜이의 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쉼 없이 조잘댔다.
결국 다솜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산책길에서 힘들어도 멈추어서는 애가 아닌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잠깐 벤치에 앉았다 갈까?" 하고 서둘러 앉을 곳을 찾았다. 불러도 반응이 없는 다솜이를 벤치에 앉히고 비장의 무기인 간식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솜이는 간식을 코 앞에 두고도 본체만체하며 미동도 없었다. 심지어 간식을 먹지 않겠다며 고개마저 돌려버렸다.
다솜이가 삐친 것이다. 강아지가 삐친다고? 다른 이유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나도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혹시 내가 '그 치와와' 얘기를 너무 많이 그런가?'란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굳은 표정으로 꼼짝 않는 다솜이를 겨우 달래 가며 집으로 데리고 왔다. 현관문이 열리자 다솜이는 발도 씻지 않고 집의 제일 구석에 위치한 안방 화장실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자 이제 나까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데 혼자 있든지 마음대로 해!"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다솜이를 화장실에 두고 거실로 나오는데, 마침 동생과 동생의 남자친구가 들어왔다. 동생의 남자친구는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키운 경험이 많아서 우리가 '유선배'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다.
"둘이 싸웠어?"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묻는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유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강아지 나이 10살이면 사람 말 다 알아듣죠."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이 정도로 잘 알아듣는다고? 나는 강아지도 삐치는지 이날 처음 알게 되었다. 다솜이가 이렇게 감정이 예민한 강아지인지도!
나에게 단단히 삐친 다솜이는, 동생이 안방 화장실 문을 열고 "다솜아~ 무슨 일이야~?" 하고 말을 거니 쪼르르 나와서 동생에게 폭 안겼다. 다솜이가 나 때문에 삐쳤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다솜이는 그날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하고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잤다. 삐친 강아지가 밤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스럽게 찐 고구마와 소고기로 극적인 화해를 했다. 그날처럼 고구마의 존재가 고마운 순간이 없었다.
다솜이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도 허투루 말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게 그 날 이후였던 것 같다. 다솜이는 잘 알아들을뿐 아니라 감정까지 예민하니,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이번에는 고구마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솜이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주기로! 다솜이는 똑똑하고 민감한 강아지이니, 내가 하는 말에도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다솜이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는 말대로 다솜이가 지켜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집 강아지! 똑똑한 강아지! 착한 강아지! 예쁜 강아지! 사랑스런 강아지! 건강한 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