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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인생의 클리셰

틀린 적 없는 불김함

by 한자루

무엇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난로에 몸을 녹이면서도 죽음과 싸운다. 하지만 결국 이기는 쪽은 죽음이다.

- 쇼펜하우워




삶에서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지구가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황량하고 처량하고 푸석거리는 모래알처럼 까끌거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는 물러서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물러설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직접 내 결정을 전하고 싶었다. 단지 문자나 전화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녀를 만나 진심을 전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와 잠시 만날 수 있을까?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나는 그녀에게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오늘은 안될 것 같아요. 토요일 오후에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토요일에 보자."

혹시나 그녀가 만남을 거절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토요일에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토요일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몹시 피곤해 보였고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화장한 얼굴 밑으로 초췌한 그녀의 그늘이 감춰지지 못한 채 그대로 반사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 거란 추측만 했다.

이제 대만으로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테고.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 네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물러서기로 결심했어.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인 슬픔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그녀와 나는 악수를 한 후 헤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된 것 같았다. 미련은 남았지만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는 그녀의 여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빠, 잠깐 카페에 와줄 수 있어요?"

그녀의 여동생이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연락이 뭔가 불길한 내용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지금 바로 갈게."

카페의 밤은 한산했다. 서너 명의 사내들만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서 티브이를 보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은 무채색의 담담한 얼굴로 다가왔다.

"오빠. 언니는 대만에 갈 수 없어요."

"무슨 소리야?"

"비자를 만들기 위해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동생의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자 나의 불길했던 예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

"언니가 위암이래요. 상당히 진행된 상태래요."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몇 주 전 그녀는 희망에 부풀어 대만으로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해외로 노동비자를 받는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시간이 걸렸다.

대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자를 위해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의 위암 의심 소견을 받았고 정밀 검진을 통해 결국 그녀는 위암 2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장기간의 영양부족과 과로로 인한 위염은 위궤양으로 진행되었고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위궤양에서 악성 종양이 자라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그녀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선뜻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그렇게 숨기려고 했던 마음 한편을 이해하고 싶었다.

쓸모없는 자존심을 세운 것이라고 일축해 버리기엔 그녀의 삶은 너무나 복잡했다.

그렇게 쉽게 그녀의 결정을 단정짓고 싶지 않았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을 것이다.

대만으로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큼이나 기대감에 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모든 계획을 뒤로한 채 병마와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은 하얘졌고 가슴은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찼다.

그녀와 헤어진 지 며칠이 지나도록 나는 내 잘못을 되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작정 병원으로 찾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게 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의 동생에게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연락을 했다.

그녀의 동생은 언니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병원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 아니라 언니에 대한 걱정과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언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돌아가 달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동생과 택시에 올랐다.

그녀의 위암 소식을 들은 지 5일 만이었다.


그녀의 동생이 병실 문 앞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오빠,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리고는 동생이 병실 안으로 사라졌다.

병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는 몇분의 시간이 몇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병실문이 다시 열리고 그녀의 동생이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하얀 침대 시트만큼이나 하얗게 변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안녕, 잘 지냈어?" 이런 정신나간 인사가 어디있는가? 나는 정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인사를 했다.

"네. 오빠, 오빠도 잘 지냈어요?"

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괜찮아? 많이 아팠지? 소식을 듣고 너무 걱정했어. 미안해, 이렇게 늦게 와서. 내가 불쑥 찾아오는 게 너를 더 힘들게 할까 봐 빨리 올 수 없었어."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괜찮아요. 오빠가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옆에 있을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인생이란 생각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에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나는 생각했다. 신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에는 극적이고 긴장감으로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이 별로 없는 지루한 영화같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 나서야 그런 밋밋하고 평범한 인생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의 상황이 삶을 어디로 이끌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하고 희망을 꿈꾸게 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병실의 침묵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가로등불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고, 힘이 없었다. 나는 그 손을 더 따뜻하게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좋아하는 그 꽃, 가져왔어. 예전에 함께 산책하던 공원에서 피었던 꽃이야. 기억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죠. 오빠랑 함께 산책했을 때 피어있던 그 꽃들이죠. 참 예뻤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그 속엔 분명한 기억과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꽃다발을 그녀의 머리맡에 놓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정말 행복했었어. 너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그녀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빠도 그랬어요? 그 순간의 기억들이 이제 저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웃음소리, 함께 걸었던 길, 그리고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게."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 졌다.

그 눈물 속에는 고마움과 사랑이 가득했다.

"고마워요, 오빠. 사실 나...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독하게 살아온 그녀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여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를 위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이라고.

병실의 차가운 공기는 어느새 따뜻해져 있었다. 우리의 마음이 서로에게 닿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때때로 잔인한 장난을 친다.

어느 날은 평온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강인함을 시험하는 시간이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곁을 지키며 함께 싸우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는 함께 이겨낼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순간 속에서도,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난 7월 19일 오후 6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이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전날부터 쫑 서기장이 건강 문제로 사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다음날에는 그가 뇌사 상태라는 말이 퍼졌다. 결국 베트남 공산당이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며, 베트남 전역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베트남 공산당은 쫑 서기장의 사망 원인을 '노환과 중병'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에서 유학한 그는 지난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베트남의 실용주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베트남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33266_2282881_1721570236894584586.png 응우옌 푸 쫑 서기장

쫑 서기장의 국장은 25일부터 26일까지 이틀간 진행될 예정이다.

이 기간 동안 모든 관공서는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를 반기로 게양하며, 모든 연예·오락·스포츠 행사가 중단된다.

베트남 공산당은 "쫑 서기장은 60년 경력 동안 인민의 영광과 혁명 대의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유해는 하노이시 쩐탄통 거리에 있는 국립장례식장에 안치될 예정이며, 이틀간 조문객을 받은 뒤 26일 오후 3시 하노이 마이직 묘지에 안장된다.

국내외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애도의 뜻을 표하는 조전을 보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일 베이징에 있는 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베트남의 권력 구조는 공산당이 통치하는 형태로, 서열 1위인 공산당 서기장과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4인의 집단 지도 체제였다. 그러나 2018년 쩐 다이꽝 국가주석의 사망 이후 쫑 서기장이 서기장과 국가주석을 겸직하며 3인 체제로 변했다. 쫑 서기장은 2011년 당 서기장에 오른 이후 10년 넘게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2021년 푹 총리가 국가 주석으로 올라섰으나, 작년 1월 돌연 사임하면서 또 람 공안부 장관이 국가 주석 자리를 이어받았다. 최근 쫑 서기장이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권력을 넘겼다는 소식에 이어 그의 사망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당분간은 과거의 4인 지도 체제가 아닌 3인 지도 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쫑 서기장은 부정부패 척결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공무원 사회 내부에서는 부패 척결이 정적 축출의 도구로 이용된다는 불만도 있었다.

그의 사망 이후 반부패 운동의 동력이 약해질지, 방향이 어떻게 변화할지 주목된다.

로이터통신은 쫑 서기장의 퇴진으로 베트남에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현지에서는 서기장 직무 대행을 맡은 람 국가주석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2021년 임기를 시작한 공산당 정치국 위원 중 기술 관료들이 대거 퇴임한 가운데, 공안국 장관 출신인 람 국가주석이 서기장 직무 대행까지 맡으면서 공안부의 권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33266_2282881_1721570540399614429.jpg 서기장직을 겸임하게 된 토 람 국가 주석

쫑 서기장의 사망으로 인해 베트남 정치 시계는 한동안 급박하게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재로 인한 권력 공백이 어떻게 채워질지, 새로운 지도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베트남 국민들은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면서도, 불확실한 정치 상황 속에서의 안정을 바라고 있다.


쫑 서기장의 사망으로 한동안 베트남 정치 시계는 급박하게 돌아갈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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