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분노는 응징의 욕구
오늘도 나는 길을 나섰다.
발 아래로 펼쳐진 조용한 길을 걸으며,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의 석양 속에 내 마음을 잠시 놓아두었다.
잎사귀들이 떨어지는 소리, 풀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평온해 보였지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그와 정반대였다.
분노, 내가 언제나 내 안에서 자주 마주하는 그 불타는 감정이었다.
오늘 산책의 동반자는 바로 그, 분노다.
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왜 우리 안에 그렇게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를 고민해본다.
가끔은 그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내 안에 사는 불쾌한 이웃 같은 존재랄까.
그럼에도 분노는 때때로 나를 깨우는 종소리 같기도 하다.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걸까?
분노는 우리를 사로잡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본능적이고, 때로는 가장 파괴적인 것이다.
나는 가끔 그 기원을 원시적인 것에서 찾으려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사냥을 하던 시절, 분노는 아마 생존의 도구였을 것이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맞서 싸우기 위한 에너지원, 마치 사자의 포효처럼. 우리 안에 숨겨진 고대의 무기 같은 것.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사자처럼 물어뜯을 필요가 없는데도 이 분노라는 감정은 여전히 우리에게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이렇게 정의했다. "분노는 고통을 수반하는, 응징을 위한 욕구다."
즉, 누군가 우리에게 해를 가했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한 응징의 욕구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분노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정의감과 연결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분노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지도 모른다.
‘이건 불공평해! 이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야!’
이런 생각들 속에서 분노는 머리를 쳐들고 우리 마음을 장악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분노가 정당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모두가 화를 낼 수는 있지만,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정당한 분노와 파괴적인 분노의 경계가 매우 흐릿하다는 데 있다.
산책을 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화를 낼 때, 그 분노는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나 자신의 불편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분노는 불처럼 제어하기 어렵다.
불은 작은 불씨로 시작하지만, 순식간에 커져 집을 삼키기도 한다. 분노도 그렇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만이나 짜증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커지고 증폭되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휘말려 폭발할 수밖에 없다.
스토아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실용적인 답을 제시한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분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즉,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며,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만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철학은 분노를 줄이는 데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
산책 중에 우연히 길이 막혔거나, 나뭇가지가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고 해서 그것에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논리적일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분노는 이성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그 상처가 분노로 변해 불타오를 때가 있다.
불쾌한 상사의 말, 지적받은 프로젝트의 오류, 오해에서 시작된 인간관계의 문제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분노는 그저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들 뿐이다.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노의 뿌리에는 이기심이 숨어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방어하려는 본능 때문에 화를 낸다.
내가 대우받지 못하거나, 내 가치가 훼손된다고 느낄 때 우리는 쉽게 화를 낸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분노는 종종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분노의 이런 메커니즘을 더 쉽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분노를 이성적으로 다루는 능력이 조금은 늘어난다.
젊을 때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냈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저 웃고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생의 교훈처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놓아주게 된다.
그러나 이기심에서 비롯된 분노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그 분노가 정당하다고 착각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상처 준다.
장자는 "화내는 자는 자신을 태우고 남을 태운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분노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나 자신을 갉아먹고, 나와 대립하는 상대방도 상처 입힌다. 분노는 결국 자기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분노의 순간에는 그 사실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산책을 하며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작은 불만들이 나를 조금씩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느끼는 이 분노는 불필요한 감정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분노를 다루는 또 다른 방법은 유머다.
나는 때로 분노의 순간을 가볍게 넘기기 위해 스스로를 비웃는 방법을 선택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분노하는 많은 순간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한 예로, 가족과 함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음식이 너무 늦게 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고객에 대한 모욕이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한 마디 툭 던졌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다리면서 세상 문제를 다 해결하겠네."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노는 쉽게 사라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분노는 상황을 바꿀 수 없지만, 내 기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유머라는 사실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는 유머러스한 시각이 필요하다.
그렇게 분노는 스르르 녹아내린다.
마크 트웨인은 "인간은 웃을 수 있는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인식하고, 그 위에 웃음을 덧입힐 수 있다.
그 순간, 분노는 그저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대신, 가볍게 물을 뿌리는 것이다. 항상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순 없지만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분노를 제어할 수 있다.
이제 걸음을 멈추고, 깊은 숨을 들이쉰다.
한바탕 긴 생각을 끝내고 나니, 분노에 대한 사색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사랑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사랑과 분노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화내지 않지만, 때때로 우리는 사랑 때문에 화를 낸다.
사랑은 기대를 만들고, 기대가 어긋날 때 분노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쉽게 화를 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만큼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화살을 돌린다. 하지만 이 역시도 내 이기심의 표현이다.
사랑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욕심으로 그 사랑을 가득 채우려다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집이 저기 보인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안의 분노에 대해 생각해본다. 분노는 마치 불씨와 같다.
잘못 다루면 쉽게 커져 나를 태우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다룬다면 오히려 나에게 동력을 줄 수도 있다.
분노는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분노가 어떻게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 분노를 그냥 두지 않고, 이해하고 다루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것이 지혜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들의 언행 속에 나를 조절하고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결국 분노는 우리의 삶에서 항상 존재할 것이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성숙이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