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죽음에 이르는 존재
산책을 나서기 전 목표를 설정한다. 오늘은 3Km를 걸어야겠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왜?"
요즘 산책이 예전 같지 않다. 살을 빼겠다는 목표가 생긴 이후 산책이 계획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몇 Km를 걸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3Km를 채워야 하니까, 스마트워치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속도를 조절하고, 남은 거리를 체크한다.
산책이란 원래 걸음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스마트 기계가 제시하는 목표가 없으면 불안하다. 오늘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뭔가 부족한 것 같다.
스마트워치가 오늘의 목표 달성률을 자랑스럽게 알려줄 때, 나는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해냈구나!!"
하지만 그 만족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곧 이어질 생각은 언제나 같다.
"그래, 내가 3Km를 걸었어. 그런데 그래서 뭐?"
왜 나는 이것에 이렇게 집착하게 된 걸까?
사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했다. 즉,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세운 작은 목표들은 단지 임시적인 이정표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마치 목표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세운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산책 중간에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본다.
남은 Km를 확인하는 순간, 내 걸음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내가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몇 번이나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지 계산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산책일까?
정작 중요한 순간들을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에 집중하느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목표가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큰 목표 외에도 우리는 많은 작은 목표들을 설정한다.
문제는 그 목표들에 너무 집착하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좌절감을 느끼고, 달성해도 만족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를 쳐다보며 나는 그 목표가 만들어내는 압박을 경험한다.
그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뭔가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대로 목표를 채우면 잠시나마 기쁨이 있지만, 그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더 큰 목표가 다가온다.
그런 목표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를 내려놓으면 어떨까?
오늘 걸어야 할 Km는 잊어버리고 그저 걸어보는 것이다.
목표 없이 걷는 산책은 그 자체로 충만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자유가 그 속에 있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목표가 내 삶의 본질을 압도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목표에 끌려가는 기계처럼 되어버린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목표를 이루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우리가 걷는 길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로 이어지지만, 그 종착지로 가는 길이 어떻게 채워지느냐가 중요하다. 매 순간 목표에 얽매이지 않고, 내 존재를 느끼며 걷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로움이 아닐까?
오늘은 스마트워치를 내려놓고 그냥 걸어보기로 한다.
오늘의 목표가 몇 Km인지, 몇 시간을 걸어야 하지는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볼 것이다.
목표는 단지 도구일 뿐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길의 방향은 결국 정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 그 도착점까지 가는 여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작은 자유를 누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숫자에 매달리기보다는, 순간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잔디와 함께하는 작은 기쁨을 만끽하는 것.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가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목표 없는 삶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큰 목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