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불
유치원을 떠난 후에도, 소녀의 짧은 메시지 영상이 글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누가 듣고 있다면, 제발 사람들을 고쳐주세요..’
단순한 부탁이었지만, 글록은 그 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을 붙드는 손짓이었고, 책임을 던지는 시선이었다.
탐사선 ZK-32673호는 북아프리카 내륙의 메마른 고원을 향해 날고 있었다.
북아프리카로의 여정은 단순한 고고학적 호기심때문이 아니었다.
우주 감시국은 인류 멸망의 기원을 추적하며, 인류가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 그 자체에 주목했다.
그리고 글록과 알파-3는 그 중심에 불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인간이 자연의 힘을 처음으로 '길들였다.'라고 여겼던 순간.
인간들은 불로 스스로를 지키고, 모이고, 나누며 생존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불은 욕망과 지배, 파괴의 상징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글록은 인류 멸망의 유전자를 바로 그 시작점에서 찾고자 했다.
북아프리카는 인간이 불을 사용한 최초의 흔적이 발견된 지역이다.
수백만 년 전, 그들은 천둥과 번개의 흔적에서 영감을 얻었고, 불을 ‘두려움’에서 ‘통제’로 전환한 첫 생명체가 되었다.
탐사선 ZK-32673호의 차폐막이 열리자 글록과 알파-3는 고원 위로 조심스레 내려섰다.
알파-3는 바람결에 맞춰 움직이며 장비를 가동했다.
“지하 분광 분석 및 탄소 동위원소 역추적 가동… 완료.
글록, 지금부터 약 40만 년 전,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화덕 흔적을 기반으로 지층의 기억을 시각화해볼게요.”
알파-3의 본체에서 퍼진 가느다란 빛 입자들이 땅 위를 천천히 덮어가며, 주변의 형태를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형체를 얻듯, 불빛과 바위, 움막과 사람의 형상이 주위를 감쌌다.
그것은 단순한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너무 정교하고 생생해서 글록은 어느새 불 앞에 모여 앉은 호모 에렉투인들의 곁으로 스며든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검게 탄 나무더미, 움막의 실루엣, 불꽃에 반사되는 사람들의 윤곽이 완벽한 현실감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알파-3는 주변 공기를 스캔하며 살짝 머리를 기울였다.
“글록, 여긴 뭔가 많이 그을렸네요. 아마 어둠을 몰아내려 했겠죠. 근데… 너무 겁이 났던 걸까요? 불을 켜다가 지구를 조금 태워버린 것처럼 보이네요.”
글록은 피식 웃었다. “알파,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라고. 좀 더 진지하게 분석을 부탁해.”
“물론이죠. 이 구역은 고온 탄화 흔적과 도구 잔해, 다수의 뼈 구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 변형과 조리 흔적, 공명 잔재도 함께 감지됩니다. 고대 인간이 의도적으로 불을 사용한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글록은 바닥의 그을음 자국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알파-3가 덧붙였다.
“흥미로운 건 이 흔적이 단지 물리적 잔재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여기엔 공명 잔재, 그러니까... 일종의 감정적 시간 에코도 남아 있습니다. 열과 두려움, 생존의 기억이 공기 속에 얇게 떠 있는 느낌이랄까요.”
글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곳에선... 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군.”
글록과 알파-3는 바위 그늘 아래에서 움막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 안엔 조악한 형태의 돌칼과 깨진 뼈, 그리고 불에 탄 나뭇가지들이 모여 있었다. 알파-3가 조심스레 구조를 투영하며 말했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모여서, 음식을 익혔던 것 같아요. 덤으로 야생 짐승도 막아냈고요. 열은 단순한 생존 조건을 넘어, 공동체를 형성한 매개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 이 정도면 고대판 레스토랑이네요. 불가마 앞 테이블 4석.”
글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불은 그들에게 따뜻함이었고, 빛이었고, 어쩌면 처음 가진 슈퍼파워였을지도 모르지. 문제는... 언제나 켜놓고 싶어 했다는 거야.”
글록은 다시 손에 남은 그을음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것 봐, 알파. 불은 언제나 무언가를 태우고 흔적을 남기지. 따뜻하게 하려면, 무언가를 태워야 해. 그건 나무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때론… 다른 인간이기도 했겠지.”
그 순간, 그들 곁의 공기가 기묘하게 떨렸다.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남겨진 떨리는 음처럼, 바위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열기와 미세한 빛의 실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알파-3가 급히 데이터를 캡처하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체불명의 시공간 변위 잔류 에너지 감지... 시간 왜곡 계열의 미세한 파동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역사적 흔적이 아니에요. 여긴... 시간의 일부가 고여 있어요.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장면처럼.”
글록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손을 들어 공기의 떨림을 더듬었다.
차가운 바람도, 바위의 온도도 사라지고, 갑작스레 깊은 감각 하나가 글록을 휘감았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글록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한 장면이 영화처럼 재연되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별빛도 희미한 하늘 아래, 원시의 숲 속 어귀에 작은 불꽃이 움막 앞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빛이 깜빡이며 주위를 밝히고, 주위를 감싼 몇몇 인간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그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헝클어진 머리칼의 원시 소녀가 불빛 앞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는 불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손을 내밀다가 뜨거운 불길에 손을 움츠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무서운 거야?”
그 목소리엔 두려움과 경이,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마치 불이 가진 힘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그 의미를 묻는 것처럼.
그때, 누군가의 손이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해야 해. 그래야 조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무섭다고 도망치기만 한다면, 우린 영영 따뜻해질 수 없어.”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불은 우리를 살릴 수도, 삼켜버릴 수도 있어. 우리가 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이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거야.”
그 말은 단순히 호모 에렉투스인들이 웅웅대는 소리였지만 글록에겐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한 의미로 번역되어 들렸다.
그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세대를 관통하는 지혜처럼.
글록은 숨을 멈췄다.
그 장면이 어디서 온 것인지, 왜 그의 시야에서 재생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글록이 그들 곁에 있었던 것 같은 감각, 아니, 마치 그들이 아직 이곳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었다.
글록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알파-3가 옆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글록? 당신 지금, 기억 반응이 있었어요. 강한 감정 자극에 의해 시각화된 비전... 이건 단순한 과거의 데이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뇌파 패턴이 마치 꿈을 꾸는 상태처럼 변했었거든요. 간단히 말해, 타임슬립의 맛보기 버전같은 수준이죠."
"알파, 나... 거기 있었던 것 같았어. 불 옆에. 그 아이 옆에. 마치... 시간 한 조각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때 알파-3가 갑작스레 높은 주파수로 경고음을 냈다.
“글록! 공간 파형이 이상합니다. 미세한 시공간 밀도의 이탈 감지... 주변 잔재가 움직입니다.”
글록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허공이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열기나 착시가 아니었다. 땅 위에, 공기 사이에, 시간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났다. 희미한 형체. 작은 어깨, 짧은 팔, 그리고 돌아보는 듯한 실루엣.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영상 속 소녀가 떠올랐지만,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기억이 현실을 닮기 시작한 건지도 몰랐다.
그 아이는 불빛 너머에서 글록과 알파-3를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다기보다 과거가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글록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세히 그 형체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자 곧 안개처럼 사라졌다.
알파-3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한 에너지 잔재가 아닙니다... 시간 그 자체가 이곳에 눌러앉아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래된 감정이 시간을 부풀리고 있어요. 누군가 이곳에서... 강하게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아요.”
글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나즈막이 말했다.
"기억은 죽지 않아. 특히 누군가 간절히 붙잡고자 했던 기억은. 불은... 그 기억을 지피는 도화선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
고원 위에 바람이 불고, 검게 그을린 돌들이 햇살 아래에서 미세하게 반짝였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인간이 남긴 경고가 지금도 그곳 어딘가에서 속삭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글록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보고서 정도로 정리될 일이 아니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