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0 대 1, 전설의 싸움

숫자는 무기가 아니다.

by 한자루




자연은 본능이다.
계산도, 의도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건 순간에 반응한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자연은 아름답다.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 잔잔한 흙냄새, 길가에 핀 들꽃.
모든 게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그 고요함을 깨는 순간이 있다.

길 건너에서 갑자기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온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은 쫄깃해진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아무런 판단도 서지 않는다.

다행히 개는 나를 스치고 어디론가 계속 달려간다.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방금 개가 진짜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일 혼자가 아니라 동료가 100명쯤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생각은 곧 또 다른 상상으로 번진다.

‘만약... 성인 남성 100명이 모이면, 고릴라 한 마리쯤은 이길 수 있을까?’

그렇게 머릿속에 하나의 사고실험이 시작된다.




“남자 100명과 고릴라 한 마리가 싸운다면 당연히 사람이 이기지 않을까?”
이런 얼통당토 않은 질문, 처음 들으면 웃기지만, 나처럼 은근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숫자가 깡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그래도 수적으로 밀리진 않잖아?’ 같은 본능적 확신이 올라온다.

자. 이제 차분히 생각해보자.
진짜 인간들이 이 압도적인 고릴라 한마리를 이길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고릴라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릴라는 우리와 같은 포유류지만, 아예 스케일이 다른 존재다.

평균 체중은 150~180kg, 키는 약 1.7m 정도다.
하지만 수치만 보면 뭐 별로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고 착각하기 쉽다.
고릴라를 실제로 마주하면, 크기가 ‘크다’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상체는 육중하고, 팔은 허벅지보다 굵으며, 전신에 힘줄이 도드라진다.
존재 자체로 이미 위협이다.

근력은 인간보다 4~9배 이상 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 녀석이 팔을 한 번 휘두르면, 성인 남성이라도 한방에 튕겨 나간다.
벤치프레스 수치로 치면 최대 800kg 이상을 들어올리는 수준.
실제로 어떤 고릴라는 철창을 휘거나 나무 기둥을 꺾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참고로 인간의 평균 펀치력은 300~500뉴턴, 고릴라는 4,500뉴턴 이상의 힘을 기록한 사례가 있다.
이건 단순한 스펙 차이가 아니라, 전투력의 격차다.

한마디로, 인간 한 명은 고릴라의 1/100 전투력도 안 된다.


이제 상상을 조금 더 구체화해보자.

평범한 체격, 특별할 것 없는 체력의 성인 남자 100명.
그중 30명은 군 복무를 마쳤고, 나머지는 헬스장에 몇차례 기웃거렸을 뿐이며 운동 경력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무기는 없다. 오로지 맨몸이다.

그들이 고릴라 한 마리와 싸운다고 해보자.
고릴라는 굳이 싸우고 싶진 않지만, 위협을 느끼면 즉시 공격 모드로 변한다.
공격은 빠르고 정확하다. 인간의 얼굴이나 목 같은 급소를 노린다.
팔에 잡히면 들려서 내던져진다. 인간이 때린다고 해도 맷집이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다.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앞줄에 선 20명은 제대로 반응도 못 도륙당하고 중간줄은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마지막줄 30명은 보고만 있다가 ‘형 괜찮아?’만 외친다.

고릴라의 움직임은 인간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거칠다.

이 싸움은 대결이 아니라 혼란 그 자체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래도 100명이 전략 짜서 협공하면 되지 않나?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너무 무시한거 아니야?”

그건 게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현실의 100명은 생각보다 일사불란하지 않다.

그렇다.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시뮬레이션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처절하게 무너질뿐이다.

이들을 고릴라 앞에 세워보면, 바로 드러난다.


먼저 이 압도적인 고릴라 앞에서 스스로 리더를 자청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

혹여 리더가 나타난다 해도, 몇 명은 말을 안 듣고 먼저 돌진한다.

이때 최소 10명은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시작한다. 이런 보기 드문 장면을 SNS에 올려야 하니 말이다.

일부는 싸움을 말린답시고 우왕좌왕 하다 고릴라에게 얻어맞는다.

뒷줄에 흩어진 나머지는 언제 도망쳐야 하는지 두려움에 떨며 상황만 지켜본다.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어설프고, 각자도생이다.

‘100명이면 무조건 이기지 않겠어?’는 협력이 완벽하게 작동할 때의 이야기다.

인간은 ‘잘 조직되면 강하다’는 전제를 쉽게 까먹는다.


싸움은 심리전이다.

고릴라가 가만히 있다가 으르렁 한 번만 해도, 공포, 주저함, 불확실성은 인간들 사이로 순식간에 퍼진다.
이성은 뒤로 물러나고, 본능이 소리친다.

“도망쳐...!!”


고릴라는 확신을 가진 존재다.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를 안다.
자신의 무리를 지키기 위해서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든, 어쨌든 이 귀찮은 존재들을 물리치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라도 싸운다.

고릴라가 무서운 건 단순한 ‘힘’ 때문이 아니다.
그가 가진 명확한 싸움의 이유가 진짜 무기다.


이 싸움의 쓸데없다.
하지만 묘하게 현실을 닮았다.
우리는 숫자에 취하고, 전략을 과신하고, 공포를 무시한다.
진짜 강한 건 덩치도, 수치도 아니고 확신이다.
자기가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고 움직이는 존재는, 한 명이어도 무섭다.
그게 진짜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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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