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사람이 이긴 경기
일요일 새벽 6시.
산책길 옆으로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안에는 아기자기한 농구장이 있다.
그리고 그 공원 앞을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이 지나가고 있다.
평균 연령 43세. 허리에는 찜질 패치, 손에는 커피, 눈빛은 진지하다.
오늘도 다들 “몸 좀 한번 풀어볼까.”라고 말하듯 결의에 찬 걸음에 기합이 넘친다.
농구장을 지나는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을 보자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사고실험이 시작된다.
푸른 잔디가 깔린 운동장.
화려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이 경기를 위해 운동장에 모여든다.
조기축구 아저씨 20명, 오늘도 기합이 넘친다.
평균 연령 : 43세,
복장 : 축구 유니폼, 운동화. 일부는 웃통을 벗음.
분위기 : 진지한데 뭔가 예비군 아저씨 냄새가 남
장비 : 농구공 1개, 골대 높이 3.05m
규칙 : 없음. 그저 ‘골대에 넣으면 됨’
축구인 줄 알고 모였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이 아저씨들은 맨발로 농구공을 차서 농구 골대에 넣어야 한다.
이게 가능할까?
지금 이 운동장은 의지, 에너지, 구성원이 모두 갖춰졌는데 딱 하나, 목표만 어긋나 있는 집단의 축소판이다.
처음엔 그럴싸하다.
패스가 오가고, "뒤!" "줘!" "왼쪽!" 소리가 퍼진다.
하지만 공이 너무 튄다. 농구공은 가볍고, 둥글고, 충격에 잘 반응한다.
정확한 슈팅은 커녕 컨트롤 자체가 안 된다.
누군가 점프해서 헤딩 시도하지만 허공만 스친다.
다른 누군가는 킥으로 넣으려다 공을 골대 뒤로 멀리 날려버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공을 잡고 손으로 던지기 시작한다.
이미 축구는 끝났다.
처음엔 축구로 시작했지만, 중반쯤 되면 양상은 완전히 바뀐다.
어떤 사람은 농구 드리블을 시도하고, 다른 이는 배구 점프슛처럼 공을 날린다.
몇몇은 공을 몰다 자빠진다. 나머지는 다 웃고 있다.
이건 더 이상 경기라기보다 집단 에너지 발산이다.
의미 없이 땀을 흘리고, 소리 지르고, 웃고, 무릎 잡고 숨을 고른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금세 분위기가 바뀐다.
점점 규칙이 흐려지고, 대신 움직임이 유연해진다.
이젠 더 이상 축구도, 농구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몰입된다.
목표는 흐려졌지만, 열정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때부터 이 경기는, 경기라기보단 유희가 된다.
어느새 경기가 목적이 아니라, 경기라는 형식 안에 담긴 에너지가 목적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이상하지만, 나름대로 완성된 풍경이다.
틀렸다고 멈춰야 하는 건 아니고, 틀렸는데도 진심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인간적이다.
결국 조기축구 아저씨들은 한골도 넣지 못했다.
그런데 그와중에 아저씨 한 명이 트램펄린을 가져왔다.
또 한 명은 “점수는 그만 세자.”며 맥주를 꺼냈다. 이해한다. 셀수 있는 점수가 하나도 없으니.
그리고 심지어 나중에는 다 같이 단체 줄넘기까지 한다.
누가 이겼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다들 웃었다.
이게 무의미했을까?
나의 답은 '아니다.'이다.
이건 목표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진짜 유희다.
목표가 무너진 그 순간, 오히려 모두가 더 자유로워진다.
경기는 끝났지만, 놀이가 시작됐다.
우리는 자주 ‘의미’를 좇는다.
방향, 규칙, 목표.
그런데 가끔은 아무 의미도 없기에 진짜 몰입할 수 있는 순간도 존재한다.
웃음은 그럴 때 터진다.
때론 ‘공’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공을 진지하게 다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지를 웃으며 인정하는 유연함.
그게 이 이상한 경기의 진짜 승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놀이’였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이게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면? 조직이었다면? 국가 시스템이었다면?
그때 방향 없는 열정은 실패가 되고, 유희는 무책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구분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웃어도 되는 게임인지, 아니면 반드시 방향을 맞춰야 하는 책임의 현장인지.
그건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일이다.
다만, 진짜로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 세상에 얼마나 되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일은 그저 함께 뛰고, 웃고, 멈추면 되는 경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내 머릿속에서 펼쳐진 이 경기는 분명 그랬다.
그저 웃은 사람이 이기는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