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정의의 갈림길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by 김코알라

2021년 4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재판장 민성철)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 20인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2차)을 각하했다. 국가는 타국의 사법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상의 '국가 면제'를 이유로 한 판단이었는데, 이는 그간 일본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바와 같아 사실상 일본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선고 직후 기자들에게 "너무너무 황당하다"라고 말했다. 연로한 몸을 이끌고 휠체어에 의존해 재판에 참석했던 이 할머니는 "(재판) 결과가 좋게 나오든 나쁘게 나오든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간다. 저는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앞선 2월 1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ICJ에 회부해달라 정부에 호소한 이후 일관된 목소리였다.


KakaoTalk_20210507_124810955.jpg 「2021년 04월 2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각하 판결을 받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의 선고 이후 풍경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판결 후 기자회견에는 사건의 원고와 대리인단,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이나영 이사장과 이날 사건의 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는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하지 않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들이 아닌 ICJ 회부를 추진하고 있는 신희석 연세대 법학연구원과 함께 했다.

30년을 함께 싸워온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기억연대는 왜 같이하지 않았을까?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하는 ICJ 회부와 소송을 병행할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상희 변호사는 "그건 할머니에게 물어보라"라고 답했다. 이들은 왜 같이 하지 않을까?


직전 원고에도 썼다시피 2020년 5월, 이용수 할머니의 작심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날 이 할머니가 쏜 화살은 아이러니하게도 30년을 함께 한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전 이사장을 향해 날아갔다.

이용수 할머니의 1차 기자회견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11일, 정의기억연대의 이나영 이사장 등 관계자들은 "30년 운동을 훼손하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고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을 훼손하는 현상이 있다"라며 상황 설명을 위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할머니께 원치 않은 마음의 상처를 드려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내 정의기억연대의 지난 30년 간의 역사를 언급하며 기자들을 향해 "그 역사를 알고는 있나 의구심이 든다. 책은 한 줄 읽었을까?"라며 "방해세력과 동조하여 이 문제를 폄훼하는 걸 반성"하라며 훈계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쏘아 올린 의혹 앞에 이들은 어쩌면 이토록 당당한가. 자신들이 임의로 그어 놓은 기준을 절대적 진리로 규정하고, 그 숭고한 진리를 엄숙하게 수행해 나가는 순교자의 '선민의식'이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의혹 제기와 과도한 언론의 관심에 억울한 감정이 섣불리 앞서 나간 탓이라 생각하고 싶다.


한편으로 사태 초기 윤미향 당시 더불어시민당 당선인과 더불어민주당, 시민단체 등 진보 진영은 '친일' 프레임을 이용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지금껏 자신들의 행적에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저자는 친일파다!", "토착 왜구다!" 하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담론을 파괴해온 안일한 전략에 또다시 기댄 것이다.


KakaoTalk_20210427_163614376_04.jpg 「이른바 '윤미향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5월 중순 서울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인근 풍경」


하지만 그들은 이번 사태가 '과연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를 논하는 의혹이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친일파'다 '토착 왜구'다 하며 인간 인하의 취급을 해왔던 자들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철저하게 이용해왔다?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 어떠한 의심조차 용납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성역 그 자체로 다뤄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앞세워 사리사욕을 채워왔다는 피해 당사자의 증언이 나왔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일련의 의혹들에 불을 댕긴 이용수 할머니 또한 "방해세력과 동조했다"라고 할 수 있는가?

망설임 없이 '친일' 프레임 전략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이해 당사자들이 이번 사태를 얼마나 가볍게 취급하는지, 얼마나 정치적으로 다루고 싶어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기자회견 이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KakaoTalk_20210512_173641826.jpg 「2021년 2월 16일 이용수 할머니는 한국 정부를 향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ICJ에 회부해달라" 촉구했다」


정의기억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지난 4월 21일의 소송 각하 판결과 관련하여 연일 성토의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판결 당일의 성명에서부터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의 민성철 재판장을 겨냥해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저버렸다"라고 규탄하며 "오늘의 판결을 역사는 부끄럽게 기록할 것이며 민성철 재판장의 이름 또한 수치스럽게 기억될 것이다"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판결 이후 얼마지 않아 열린 토론회에서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민성철 재판장을 향해 "역사상 유례없는 여성혐오적 성착취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뤄진 행위로 봤다. 성노예제의 본질을 흐리고 여성 전반을 모독했다"라고 비판했다. 특히 재판부가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판단한 부분에 대해 "일본의 주장에 면죄부를 줬다"라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다만 바라건대, 그렇다면 어떠한 완벽한 해결안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지난 정부에서 맺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합의'를 폐기하고, 국제법상의 관례를 뒤집어 '국가 면제'를 제한하라 주장하고, 국회의장이 내놓은 회심의 해결안을 거부하면서까지 극렬하게 저항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아주 획기적이고 확실한 해결법을 갖고 있을 터이다. 그 복안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해결 없는 갈등의 끝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은 결국 일본뿐이다.


KakaoTalk_20210512_171920372.jpg 「2021년 4월 28일 정의기억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한 데 모여 한일과거사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했다」


이들은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를 계기로 일본 정부가 출자하여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을 두고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친일'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가운데 41.3%, 99명의 피해자가 화해치유재단으로부터 현금성 지원을 수령했다.

물론 분명히 말하지만, '2015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의 의사를 수렴하지 않았거나, 일본 정부의 책임 성격 등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는 등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점은 세상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외교적 해결방안에 대해 '친일' 프레임을 씌워버리기 전에, 그 정도의 해결이라도 간절히 원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화해치유재단의 '위로금'을 수령한 99명도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다.


거국적인 '인권 투쟁'도 중요하지만 일단 먹고는 살아야 될 것 아닌가. 언제 끝날지 알 수조차 없는 외교적 정치적 논쟁에 소모되는 것보다 지난날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물론 현실보다 이상에 가치를 두며 투쟁에 헌신해온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합당한 문제 제기에마저 '친일'이다 "배후가 있다"라는 식으로 매도할 권능이 있다는 뜻이 되진 않는다.


이용수 할머니의 내부 고발 이후에도 정의기억연대는 '한미 연합훈련 반대 성명'을 내고 '한미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이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라는 연대 성명에 이름을 올린다. 한미 연합훈련과 SMA에 반대하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 정부의 출연금으로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이 '친일'이고, '더러운 돈'을 수령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위와 같은 성명과 활동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위해 모금한 아름다운 돈을 온전히 할머니들의 주머니에 넣어드렸어야 한다.


지난 5월 2일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피해자 240명 중 생존해 계신 할머니는 이제 겨우 14명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계신 분들에게도 그리 많은 시간이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한 분이라도 더 많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꽉 막힌 한일관계를 해결해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그 과정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모두 '친일파'다.

자, 그렇다면 이제 '친일파'는 누구인가?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