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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Sep 07. 2023

12. 엄마손파이


집에서 빵을 만들기 시작한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엔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 만들었다. 밀가루, 버터, 우유를 섞어 대충 반죽해서 오븐에 넣으면 뚝딱 스콘이 만들어졌다. 밖에서 파는 것보다 질감은 거칠었지만 맛은 비슷했다. 


빵 만드는 게 이렇게 쉽다고? 바나나를 넣으면 바나나 스콘, 고구마를 넣으면 고구마 스콘, 생크림을 넣으면 생크림 스콘이 되었다. 갓 구운 스콘 위에 클로티드 크림이나 딸기쨈을 발라 먹었다. 

스콘 탐색 시대가 끝나자 쿠키의 시대가 도래했다. 버터 쿠키, 진저 쿠키, 초코칩 쿠키, 쇼트 브레드 쿠키. 온갖 재료를 섞어 쿠키를 만들었다. 지인에게 선물로도 주었다. 스콘과 쿠키를 실컷 만들고 나자 버터와 우유가 지겨워졌다. 


 우리밀과 소금만으로 빵을 만들 수는 없을까? 당연히 있었다. 노버터 노밀크 베이킹 시대가 시작되었다. 깜빠뉴, 바게트, 치아바타, 올리브빵을 굽기 시작했다. 폴 앤 폴리나 빵집보다 맛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도 아니었다. 


수년에 걸쳐 진행되는 빵 굽기 여정을 지켜보던 남편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빵 반죽이 힘들 테니 도와주겠다는 명목이었지만, 더 이상 빵 마루타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남편의 베이킹 시대는 기본단계를 건너뛰고 고급단계로 바로 넘어갔다. 바야흐로 파이의 시대였다.


 어느 토요일 아침 남편이 파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주방에서 버터를 잔뜩 넣고 쿵쾅거리며 밀가루를 반죽하는 남편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아침엔 따뜻한 커피와 바삭한 파이를 맛볼 수 있겠구나.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파이 반죽이 언제쯤 오븐에 들어가는지 궁금해졌다. 물어보니 휴지(숙성)와 3절 접기를 몇 번 해야 돼서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뭐? 장난해? 그럼 파이는 언제 먹을 수 있는데.” 

“아마 오후 3시쯤 가능할거야.” 


그제야 내가 지난 10년간 한 번도 파이 만들기에 도전하지 않았던 이유가 떠올랐다. 파이는 고된 노동과 인내심으로 완성되는 빵이었다.


 냉동실에서 바게트를 꺼내 오븐에 굽고 과일을 자르고 커피를 내려 아침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신문을 본 후 점심을 차려 먹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낮잠을 자는 동안 남편은 틈틈이 반죽을 펴서 밀대로 밀고, 3절 접기를 하고, 냉장고 안에 넣고 빼고를 무한 반복했다.


 파이 겉면에 바를 연유를 만들어야 한다며 두유와 설탕을 한참 조리기도 했다. 그냥 사먹고 말지. 오후 3시, 오븐에서 파이가 구워지며 버터향이 솔솔 풍겨 나왔다. 마침내 파이가 완성되었다. 꽈배기처럼 생긴 막대기 파이였다. 


“맛있겠다. 팔미에 파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아냐. 좀 달라. 이건 엄마손파이 맛이 날거야.“ 


놀랍게도 엄마손파이와 똑같은 맛이 났다. 겹겹이 부서지는 질감도 비슷했다. 엄마손보다는 좀 더 풍미가 진하고 고급스럽긴 했지만 비슷했다. 


"와, 진짜 엄마손파이 맛이네." 

"근데 내가 만들었으니까 남편손파이지." 


그냥 사먹고 말지. 


1993년 롯데에서 만든 엄마손 파이는 한 겹씩 똑똑 떼어먹는 재미가 있다. 바삭하면서도 인공 버터향이 솔솔 풍기는 엄마손파이, 부서지면 가루가 잔뜩 떨어져 한 입에 쏙 넣는 게 좋지만, 맛을 음미하고 싶다면 조심해서 똑똑 떼어보자.


384겹이라는 웅장한 층을 자랑하는 엄마손 파이를 엄마가 집에서 만들면 금세 관절에 무리가 간다(사서 드세요). 집에서 빵 좀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페스츄리나 크로와상 같은 파이류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잘 알 거다. 파이는 상대적으로 팔 힘이 강한 남성이 반죽하는 게 합리적이라 본다. 


그러니 엄마손파이보다는 아빠손파이로 이름을 바꾸는 게 적합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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