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배가 더 출렁거리는 느낌이다.
TV를 틀어 밖의 날씨를 확인한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오늘은 씨 데이다.
크루즈가 다른 기항지로 가기 위해 하루 종일 바다를 항해하는 날을 씨 데이라 한다.
나가사키 항구에서 요코하마 항구까지 배로 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씨 데이를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크루즈 여행이 자신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신문을 살펴보니 인터내셔널 레스토랑에서도 조식이 가능하다고 적혀있다.
가보지 않은 식당이다.
음식 종류는 똑같겠지만 새로운 장소에서 먹어보기로 한다.
7시에 식당에 도착하니 입구에 직원들 대여섯 명이 주르륵 서 있다.
너무 일찍 왔나?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묻는다.
2명이라고 대답하니 자리를 안내한다. 불안한데.
안내받은 자리는 둥근 4인 테이블이다.
저녁마다 구석자리 2인 좌석에 배정받다가 널찍한 중앙 테이블에 앉으니 좋긴 한데 설마 여기 주문받는 방식인가?
그렇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이런. 아침 먹으려면 또 한나절 걸리겠구나.
어쩐지 사람들이 적다했어. 뷔페인줄 알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메뉴를 고른다. 단호박 스프, 과일 샐러드, 아몬드 시리얼, 팬 케이크, 버섯 오믈렛, 디저트로는 라즈베리 케이크와 모둠 과일을 선택한다.
팬케이크가 맛있어서 마음이 풀리긴 한다.
옆 테이블에 앉은 일본인 한 명이 밥, 꽁치, 미소시루, 반찬으로 구성된 아침을 먹고 있다.
저건 뭐지? 우리가 받은 영어 메뉴판에는 없었는데.
나갈 때 식당 앞에 붙여놓은 메뉴판을 보니, 일본어로 적힌 식사 메뉴판에는 한식 한상도 추가되어 있더라.
직원이 일본어가 함께 적힌 메뉴판을 갖다 주었다면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을 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한식을 선택하진 않았겠지만.
우리 뒤 테이블 2인석에 외국인 한 명이 앉아 있다.
덩치 큰 남성이었는데 하염없이 메인 메뉴를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꼼짝도 하지 않고 불독 같은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하며 앉아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빨리 그가 시킨 음식이 나오길 기도한다.
마침내 음식이 나온다. 커다란 접시에 식빵 반쪽만한 크기의 오믈렛이 담겨 있다.
설마 더 시켰겠지 싶었는데 그게 다다.
남자는 나이프로 오믈렛을 한 조각씩 썰어 천천히 입에 넣는다.
그래봤자 양이 워낙 작아 5분도 되지 않아 식사가 끝난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다.
아직 디저트도 안 나왔는데?
나는 그가 14층에 있는 뷔페로 자리를 옮겼을 거라고 짐작한다.
한 시간 넘게 강제적으로 아침을 즐긴 후 탁구를 치러 간다.
가는 길에 보니 익스플로어 라운지에서 영어 상식 퀴즈를 진행하고 있다.
퀴즈가 무대 스크린에 적혀 있다.
‘타이타닉 생존자 몰리 브라운의 별명은 무엇인가요?’
상식 치고는 너무 어려운데?
참여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답을 적고 있다. 진지한 표정이다.
탁구대는 실내 수영장 2층에 위치해 있다.
아침부터 수영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일찌감치 수영하러 왔나보다.
탁구대는 두 대가 있다.
탁구채가 엉망이다.
양쪽으로 고무 패드가 덧대어 있지 않은 플라스틱 탁구채다.
탄력이 없으니 탁구공이 반대쪽 네트로 넘어가질 않는다.
배가 움직여서 그런지 탁구대가 미묘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잠시 후 옆 테이블에 일본인 가족이 와서 치기 시작하는데 우리보다 핑퐁이 잘된다.
탁구채가 아니라 실력이 문제였구나.
그때 모과가 속삭인다.
“봐봐. 저 사람들은 탁구채를 가져왔어.”
그럼 그렇지. 탁구채가 문제였다.
탁구채를 가져갈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왔는데 후회된다.
1시간 동안 공만 열심히 주웠다.
크루즈에서 탁구를 치고 싶다면 반드시 개인 탁구채를 가져와야 한다.
작가 월리스가 괜히 탁구채를 챙겨간 게 아니었다.
10시에 대극장에서 ‘culinary demonstration & Galley tour'를 한다고 적혀있다.
주방과 선박 내부를 구경시켜 주려나보다.
인원이 많을 텐데 어떻게 주방에 다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대극장에 도착하니 좌석이 거의 꽉 찼다.
무대가 주방으로 꾸며져 있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거구나.
총괄 요리사, 일본어 번역가, 사회자 셋이서 진행을 시작한다.
총괄 요리사와 사회자가 영어로 말하면 번역가가 일본어로 변역한다.
요리사 말에 따르면 배 내부에는 주방이 10개 있다고 한다.
조리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92명이다.
무대에서 시범을 보일 요리는 페스토 소스를 얹은 파스타다.
요리사가 바질, 통마늘, 올리브 오일을 믹서에 한꺼번에 넣고 간다.
관객들은 요리하는 모습을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대를 바라본다.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이는 공책에 요리법을 적는 중이다.
일본인만의 진지함일까?
옆에 앉은 모과는 배 멀미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요리사가 끓고 있던 파스타 면발을 하나 꺼내 벽에 확 던진다.
벽에 붙으면 잘 익은 것이라고 한다.
면발 안에 하얀 심이 보이는지 손으로 끊어서 확인해도 된다.
익은 파스타를 건져 달궈진 프라이팬에 넣고 페스토 소스와 섞는다.
파르마산 치즈를 뿌리면 완성이다.
요리사가 생 토마토를 꽃처럼 예쁘게 깎은 후 접시 중앙에 올려놓는다..
두 번째 요리는 새우 요리다.
새우와 토마토를 기름에 볶다가 술을 부은 후 불을 붙인다(사람들의 탄성).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넣고 조린 후 접시에 담고 브로컬리 3개를 얹으면 끝이다.
크루즈가 여행 상품에 맞춰 한 번 운항할 때마다 부엌에서 쓰이는 새우 양만 600kg 이라고 한다.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새우다.
쿠킹 쇼가 끝나자 여성 가수가 나와 타이타닉 주제가를 부르며 공연을 마무리한다.
바다 한가운데 침몰한 타이타닉호가 떠오른다. 크루즈에서 불러도 괜찮은 곡일까?
그랜드 플라자에서는 한창 고리 던지기를 하고 있다.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샴페인 병이 놓여 있다.
고리를 던져 샴페인 병 목에 걸면 된다. 1인당 2개를 던질 수 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줄이 길다.
한참을 지켜보는데 쉽사리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던진 고리가 병에 들어갔다가 다시 튕겨져 나오자 지켜보던 모두가 탄식한다.
10분 쯤 지나자 승객 한 명이 샴페인 목에 고리를 거는 데 성공한다.
박수가 터져 나온다. 상품은 샴페인이다.
크루즈에서는 사소한 오락도 큰 기쁨이 된다.
혼잡할까봐 11시 15분에 미리 점심을 먹으러 간다.
일찍 가도 늦게 가도 항상 사람들이 있다.
비가 살짝 흩뿌린다.
오이와 당근이 들어간 미니 김밥과 일본 라면이 맛있다.
조리사가 육수에 라면 사리를 넣어 주면 나머지 토핑은 취향껏 더하면 된다.
나는 파와 생강 초절임만 넣었다.
일본 사람들은 그 안에 온갖 걸 다 넣고 마지막에 마른 김 한 장을 데코로 살짝 걸쳐서 완벽한 라멘 한 그릇을 만들어 간다.
과연 다르다.
모과가 배 멀미로 자꾸 잠이 쏟아진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가 한 시간 낮잠을 잔다.
2시에 수영을 하러 올라온다.
날이 흐려서 수영하기엔 좋다.
선미에 위치한 메인 풀장엔 사람이 많아 후미에 있는 작은 풀장으로 이동한다.
수영장 안에 아무도 없다. 성인만 이용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썬 베드에 누운 사람만 몇 명 있을 뿐이다.
물은 미지근하다. 앞쪽과는 사뭇 다른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이다.
잠시 수영에 집중한다.
3학년 정도 되는 한국 남자아이 한 명이 갑자기 수영장에 들어오다니 신나게 물장구를 치기 시작한다.
“살려줘, 파도가 온다.” 혼잣말을 하며 잘 논다. 씩씩한 아이다.
고요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깨진다.
보다 못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야외 바에 앉아 마가리타를 주문한다.
여기 바텐더는 잔 테두리에 소금을 대충 묻혔다.
맛도 선미보다 못하다. 너무 달다. 바텐더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바다에 있으니 갖가지 파랑색을 다 본다.
위키피디아에는 파랑 계열의 색상을 파랑, 하늘색, 옥색, 대양색, 바다색, 남색, 프러시안 블루, 데님, 군청색, 틸, 스틸블루로 분류해 놓았다.
<색이름 사전>에서는 파랑을 32가지로 나누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야지.
다시 선미에 있는 중앙 풀장으로 이동한다.
사람이 많다고 해도 탑승객에 비하면 수영하는 사람은 극도로 적다.
풀장은 깊다. 1.5m에서 2.1m까지의 깊이다.
대부분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오리처럼 둥둥 떠 있다.
자쿠지에 몸을 담근다. 따뜻하다. 바닥에서 물거품이 나와 온몸을 두드린다.
핫도그와 감자튀김을 주문한다.
수영하느라 메달을 가방에 넣어 놓았는데 음식을 달라고 하니 이름(또는 방 번호)을 물어본다.
어차피 무료인데 왜 물어보는지 궁금하다.
음식 제공 현황을 파악하려고 그런 걸까? 누군가 몰래 탑승했을까봐 그런 걸까?
너무 많이 먹으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리려고?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은 후 실내에 있는 바로 이동한다.
크루너(Crooners)라는 곳인데 선박 내에서 가장 분위기 있는 장소다.
카페 한쪽 끝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하루에 몇 번 라이브 음악이 연주된다.
5시 15분부터는 라이브 재즈 피아노 연주가 있다.
바에 비치된 메뉴판에는 주류만 적혀있다.
커피와 차는 메뉴판에 없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무얼 마시고 싶냐고 되려 묻는다.
종류를 물어보니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라떼, 그린티, 블랙티 등이 있다고 한다.
그린티를 한잔 주문한다. 가격이 얼마인지 궁금하다.
앱을 켜 확인해 보지만 계산이 되어 있지 않다.
어젯밤에 마셨던 그린티도 아직 정산되지 않았다.
설마 차는 무료인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든다.
페로니 맥주도 한 병 주문한다.
잠시 후 앱을 확인하니 맥주 가격(8.85달러)이 계산되어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커피와 차는 공짜라는 사실을.
진작 알았으면 어제도 여기 와서 커피 한잔 마실걸 그랬네.
남성 연주가가 악보도 없이 한 곡이 끝나면 이어서 다른 곡을 연주한다.
창 밖 바다를 보며 음악을 듣고 있으니 자라섬 잔디밭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야외 데크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간다.
저녁 먹으려면 걷긴 해야겠지.
공연이 끝난 후 우리도 야외 데크를 걷는다.
데크 후미 쪽에서 스모킹 존을 하나 발견한다.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여전히 멀미를 하는 모과는 점점 더 차분해진다.
“어떤 기분인데?”
“피곤한 거에 뭔가 더 얹힌 기분이야.”
“우리가 너무 방심했나봐. 다음엔 멀미약 꼭 가져오자.”
여행 책에는 멀미를 하는 승무원이 1년에 한두 명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멀미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적혀 있었다.
글을 쓴 작가는 뱃머리 맨 앞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자본 적은 경험은 없었을 거다.
직원에게 멀미약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분명 있었을텐데.
저녁은 퍼시픽 레스토랑이다.
우리는 이제 느린 서빙에 적응했다.
오른쪽 테이블에 앉은 커플이 메인 요리를 기다리며 안절부절 못하고, 왼쪽에 앉은 커플이 메인 메뉴만 먹고 나가버려도 우리 마음은 평온하다.
저녁 메뉴는 튀긴 두부, 가스파초, 달팽이 부르귀뇽, 시저 샐러드, 랍스터와 안심 스테이크, 구운 오리 가슴살, 초콜릿 피스타치오 케이크, 바닐라빈 크렘뷜레를 선택했다.
가격 걱정 없이 마음껏 고를 수 있어 좋다.
스테이크와 디저트가 특히 맛있다. 남기지 않고 모두 먹었다.
대극장 무대는 마술 공연이다.
카드 마술, 의자 붕 띄우기, 물건 사라지는 마술 등을 보여준다.
TV에서 흔히 봤던 마술이라 큰 놀라움은 없지만 열심히 박수를 친다.
마지못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많은 것 같다.
이제 잘 시간이다.
크루즈에서의 마지막 날 밤, 둥실둥실 떠다니는 침대에 기어 올라가 순식간에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