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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Oct 04. 2024

1. 빨래방과 습기

응우라이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불쾌함을 느꼈다. 근원은 냄새였다. 

공기 중에 옷이 덜 마른 냄새가 떠다녔다. 꽃이 썩는 냄새 같기도 했다. 

습하고 더운 건 한국과 다를 바 없었지만 냄새만은 확실히 달랐다. 

인간의 오감 중 후각이 가장 빨리 적응한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옷에서도 종종 쾌쾌한 냄새가 났다. 

의아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지역 중 자카르타 다음으로 부유한 도시다. 

일반 집에서 세탁기를 놓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가? 

다음 날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발리에 도착했을 때 처음 묵었던 숙소는 사누르 해안가에 위치한 리조트였다. 

우리가 묵은 방은 1층이었는데 넓은 앞마당과 테라스가 있었다. 

속옷을 손빨래한 후 벽에 걸어두었다. 

밤새 에어컨을 틀었지만 속옷은 전혀 마르지 않았다. 

젖은 수영복은 테라스에 널었는데 하루가 꼬박 지나도 여전히 축축했다. 

바닷가라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지만 그늘 아래서는 마르지 않았다. 

강한 햇볕이 직접 옷에 닿아야 말랐다. 

높은 습도 때문이었다. 


발리의 전통 가옥은 목조 형태다. 

야자나무로 전체 구조를 세우고 내부 벽이나 바닥에는 벽돌과 흙을 사용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전통 가옥의 방이었다. 방 전체가 습기를 머금으니 답이 없었다. 

여행을 온 8월은 발리에서는 가장 건조한 계절인 건기였다.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 숙박비도 우기의 두 배였다. 

건기 때도 빨래가 마르지 않는데 우기는 오죽할까. 


속옷과 수영복에서 첫날 공항에서 맡았던 덜 마른 빨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옷장에 걸어둔 옷들도 금세 눅눅해졌다. 

이불도 눅눅했고 베개도 눅눅했다. 

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었고 발리를 떠날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발리에서 숙소를 구하려면 반드시 햇볕이 드는 2층 이상 혹은 신축 건물을 택해야 한다. 마음 깊이 새기고 또 새기시길)


드라이기로 속옷을 말리다 손목이 아파 포기했다. 

구글 맵을 켜 근처에 있는 빨래방 중 평점이 높은 곳으로 세탁물을 들고 갔다. 

수십 나라를 여행했지만 여행지에서 세탁 서비스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골목 곳곳마다 런더리(landaury) 간판이 달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세탁기와 건조기 몇 대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빨래방마다 여성 한 두 명이 빨래 더미 앞에 앉아 옷을 개거나 다림이질을 하고 있었다. 

옷이 사라지고 줄어들고 망가지고 얼룩이 묻어왔다는 흉흉한 후기들이 넘쳐났지만 발리에서는 건조기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세탁물을 다음날 찾는 데이 서비스와 당일에 찾아갈 수 있는 익스프레스 서비스가 있었다. 

무게로 가격을 매겼다. 3kg에 6만 루피아였는데 당일 가격은 두 배가 비쌌다. 

한국에서 딱 3일치 속옷을 가져왔는데 오늘이 3일째였다. 어쩔 수 없이 익스프레스를 신청했다. 

저녁 무렵 세탁물을 찾으러 갔다. 

티셔츠, 치마, 반바지, 속옷, 손수건이 신문처럼 차곡차곡 개어진 후 투명 비닐로 압착되어 있었다. 

한국에도 발리의 빨래방 시스템이 도입되면 좋겠다는 어느 댓글이 떠올랐다. 

매주 손빨래를 하고 건조대에 옷을 널고 다림이질을 해야 하는 주부로서 공감할 만한 글이었다. 

한국에서도 몇몇 온라인 세탁 서비스가 있긴 하다. 

문 앞에서 수거와 배달이 이루어져 발리보다 시스템이 훨씬 낫다. 

다만 가격이 비싸 이용을 못 할 뿐이다. 


숙소로 돌아와 비닐을 뜯으니 건조한 옷들이 숨을 쉬며 방안의 습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옷에서는 은은한 재스민 향기가 났는데 다른 세탁소에서 맡긴 옷에서도 같은 향기를 풍겼다. 

리조트에 비치되어 있는 샴푸도 재스민 향이었다. 

발리의 꽃나무 캄보자(Kamboja)에서도 재스민 향이 났다. 

인도네시아의 국민 음료수라 불리는 테보똘(Thebotol) 역시 재스민 향이었다. 

재스민 향이 곧 발리 향이었다. 향은 금세 사라졌다. 


발리에 머무는 2주 동안 가장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던 건 언제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찾을지 여부였다.

세탁소는 보통 9시에 문을 열었고 4시에서 6시 사이에 닫았기에 관광을 하다가도 세탁물을 찾기 위해 숙소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다음날 세탁물을 받고 싶었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속옷이 3일치밖에 없었기에 항상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날짜 계산을 잘못하면 속옷 대신 수영복을 입고 하루를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겉옷도 사정은 비슷했다. 

속옷을 더 구입하려고 사누르에서 가장 크다는 쇼핑몰을 방문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속옷 가게를 찾지 못했다.

제때 빨래를 맡겨야 한다는 걱정이 점점 커졌다. 


우붓으로 숙소를 이동했을 때 가장 먼저 방문했던 장소 역시 빨래방이었다. 

정글에 온 것처럼 무성한 숲속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숭이가 지붕 위를 뛰어다니든 말든 내 시선은 온통 런더리 표지판에 집중되어 있었다. 

발리를 떠나기 전날 스미냑 해변의 노을을 뒤로하고 방문한 곳도 당연히 빨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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