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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May 17. 2020

8. 둘이서 라면 하나 - 스낵면

스낵면



“남편 밤에 와인이랑 먹을 안주가 없는데. 포도 좀 살까?”

“그래? 그럼 스낵면 부숴 먹으면 되겠다.”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안양천,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 시간에 맞춰 남편 회사로 마중을 나간다. 집에서 걸어가면 20분 거리에 회사가 있고 하천을 따라 갈 수 있기에 산책하기 딱 좋다. 내일은 즐거운 휴일, 오늘밤은 느긋하게 와인이나 마시며 쉬려 했는데 또 라면이라니.


 그리하여 지금 난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 한잔을 마시며 안주로는 조각난 스낵 면을 먹는 중이다. 술을 못 마시는 남편은 탄산수와 함께 스낵 면을 먹고 있다. 고등학교 때 뿌셔뿌셔를 먹은 이후로 생 라면을 부셔 먹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남편도 그렇다고 한다. 왠지 젊어지는 기분이군.


 1999년 오뚜기에서 뿌셔뿌셔를 출시하기 전까지 학생들은 주로 1992년도에 나온 오뚜기 스낵 면을 부순 후 스프를 뿌려 먹었다. 많고 많은 라면 중 왜 하필 스낵면이었을까? 스낵면은 다른 라면에 비해 면발이 가늘어 부수기 쉽고 먹기에도 좋다. 라면 표지에도 조리시간이 2분이면 된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일반 라면에 비해 1/2 수준이다. 또한 건더기스프가 없고 분말스프만 있기에 라면을 부숴 생으로 먹을 때 건더기 스프를 아깝게 버리지 않아도 된다. 건더기 스프가 없다보니 다른 라면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여 학생들도 쉽게 살 수 있다. 학창시절에 용돈이 궁했던 남편도 스낵면은 가격이 싸서 자주 부셔 먹었다고 한다. 설마 오뚜기에서 처음부터 다 계획하고 만든 거 아냐?


 스낵면 표지 왼쪽 상단에는 ‘밥 말아먹을 때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 스펀지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 밥 말아먹기 가장 좋은 라면으로 스낵면이 뽑혔다고 한다. 국물이 적당히 맵고 깔끔하여 밥과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스낵면에 밥을 말아 먹어본 적은 없기에 정말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생 라면을 부숴 먹는다면 바삭한 스낵면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갑자기 학창 시절에 먹었던 간식이 떠오른다. 그 중 가장 그리운 건 통통배 모양의 빵이다. 제천에서 국민 학교를 다닐 때 우유랑 빵 급식을 신청할 수 있었는데 우유를 싫어한 나는 빵만 신청해 먹었다. 그때 자주 나왔던 빵이 통통배이다. 럭비공 같은 모양의 빵인데 파운드 같은 단단한 질감이면서도 먹으면 부드럽게 부서진다. 한 입 먹으면 목이 콱 메어오면서 아몬드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어느 회사에서 만든 건지 아무리 찾아도 정보가 없다. 언젠가 통통배가 그리워 남편에게 먹고 싶다고 얘기 했더니 대전에서 학교를 다녔던 동갑내기 남편은 그 빵이 뭔지도 몰라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통통배야. 너는 어디에 있는 거니?


 또 자주 먹었던 간식은 식빵과 식빵 사이에 땅콩크림이 잔뜩 든 땅콩 크림빵과 동그랗게 생긴 빵 안에 하얀 크림이 든 크림빵이다. 둘 다 삼립에서 만들었는데 요즘도 복고적인 디자인에 같은 맛으로 출시되고 있어(크림은 좀 더 많아진 듯) 슈퍼에서 볼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크림빵아. 너희들도 다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통통배 너는 어디로 사라진 거니?


 모든 사라진 것들은 애처롭고 여운을 남긴다. 고정희 시인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스낵면을 먹다보니 학생이었던 때가 떠오르고, 지나가 버린 그 때를 더듬다 보니 쓸쓸한 마음이 든다. 얼굴은 기억나지만 이름은 잊어버린 친구들, 잔상은 남아있지만 또렷한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 그때가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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