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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May 22. 2020

9. 둘이서 라면 하나 - 오징어짬뽕

오징어짬뽕


 

나는 짬뽕이라고 쓰인 간판을 보면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는 청년 시절에 개고기를 먹다 크게 체한 이후 개고기를 못 드신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운 닭을 아빠가 잡아야 했는데 그때 손수 닭을 잡은 이후로 닭고기를 거의 못 드신다. 그 뒤로 점차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꺼려하시더니 고기 자체를 거의 안 드신다. 그 외에도 싫어하는 음식이 깨알같이 많으시기에 간혹 함께 나들이를 가거나 외식을 할 때면 식당 고르는 게 쉽지 않다. 그럴 때 언제든 긍정의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마법의 한 마디.


“아빠, 짬뽕 드시러 가실래요?”



 농심에서 나온 오징어 짬뽕을 보고 있자니 역시 아빠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진짬뽕은 먹어봤는데 오징어 짬뽕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1992년에 처음 출시되었으니 한번쯤은 먹어보았을 만도 한데. 남편은 예전에 먹어봤다고 한다. 오징어 맛이 나냐고 물었더니 기억이 안 난다며 먹어보자고 한다. 그래. 무슨 맛인지 알아야 글도 쓰지. 물 끓여라.


 어느 라면이건 라면이 담긴 봉지에는 고명이 올라간 라면 한 그릇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다. 그 중 오징어 짬뽕 봉지에 그려진 라면 그림이 가장 맛있어 보인다. 잘 익은 오징어 한 마리가 통째로 송송 잘려 라면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다. 입을 벌린 홍합 한 개랑 조개 두 개, 청경채도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아람단 스카프 같은 걸 두른 귀여운 오징어 녀석(그림은 무섭게 그려졌지만)이 왼손에는 라면 한 그릇, 오른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윙크를 하며 씨익 웃고 있다. 오징어야. 그 안에 너 있다..


 라면이 다 끓었다. 스프에 오징어 성분을 가미했다고 한다. 냄새를 맡아보니 정말 ‘구운 오징어 풍미’가 난다. 음~향이 좋군. 빨간 국물이 중국집에서 먹는 짬뽕이랑 똑같은 색이다. 음~색이 좋군. 호로록 한입 먹어본다. 음~이건 너구리 맛인데? 한 번 더 호로록 먹어본다. 음~진짜 너구리 맛인데? 면발도 너구리보다 얇고 국물 맛도 너구리보다 매콤한데 희한하게 너구리 맛이 난다. 그럼 오징어 짬뽕만의 특색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때 입안에서 뭔가 쫄깃하게 씹힌다. 그것은 동결 건조 오징어다. 드디어 오징어 맛이 확 느껴진다. 맛있다. 그런데 오징어를 느끼기엔 너무 적은 양이 들어 있다.


 최초의 짬뽕은 19세기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한 중국인이 만든 음식이라는 일본 유래설과 인천에 살던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먹던 차오마멘(炒碼麵)을 한국인 식성에 맞게 바꾼 것이라는 한국 유래설이 있다. 짬뽕은 기본적으로 야채, 해물, 돼지고기 등을 기름에 달달 볶아 닭이나 돼지 뼈로 우린 육수를 넣고 끓인 후 삶은 면을 넣으면 된다. 이때 짬뽕 국물 맛을 좌우하는 건 엄청난 화력이다. 온갖 야채를 강한 불에 짧게 볶으면 재료가 아삭하면서도 불 맛이 나 맛을 끌어올린다. 따라서 가스레인지나 인덕션을 사용하는 가정집에서는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한 짬뽕 맛을 내기 쉽지 않다.


 요즘에는 짬뽕에 아무거나 다 집어넣는 것 같다. 강릉에 가면 경포 호수 근처에 초당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서 조선 시대 시인이었던 허난설헌과 최초의 한글 소설을 쓴 허균이 태어났다. 우리 고모가 살고 있고 순두부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하다. 직접 만든 순두부를 파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당동에 어느 날 짬뽕 순두부 간판이 나타났다. 소나무 우거진 고즈넉한 동네에 갑자기 짬뽕 순두부라니! 이게 왠 말이냐. 물렀거라 물렀거라. 담백한 순두부와 맵고 자극적인 짬뽕이 어찌 어울린다는 말인가? 몇 년 전 초당동에 놀러갔다가 거대한 짬뽕 순두부 간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게 앞에 바글바글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또 한번 깜짝 놀랐다.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이 한 번 먹어보자고 해서 들어갔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고 한 입 떠먹는 순간 아빠가 생각났다. 아~ 우리 아빠 좋아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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