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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직업 1 - 직업군인

1, 2등을 차지한 동기의 책은 아주 깨끗했고 밤새워 공부하지 않아도

  1995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메아리마냥 반복되는 학생들의 구호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어이! 어이!(어이! 어이!)”

“까샤까샤!(까샤까샤!)”

“아까라까!(아까라까!)”


  나의 고등학생 시절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친구들과 마지막 악수를 하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언젠가 이 소심함과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극복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성공학 대중 강연가인 나폴레온 힐과 노먼 빈센트 필처럼,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실패한 사람들에게 변화할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 기술을 전수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동기부여 강사가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졸업식을 손꼽아 간절히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실제적인 변화와 현장은 졸업 후 사회인이 되고 난 뒤부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은 대학이나 취업을 위해 성적을 관리하고 지식을 쌓는 시기로 볼 수도 있지만, 사회인이 되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능력, 즉 EQ(감성지능) 능력을 기르고 습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 능력, 감정 조절 능력, 긍정적 마인드,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열정과 습관 능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나는 보통 아이들에 비해 EQ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노력했고, 남이 하지 말라고 해도 나는 변화에 열정을 가지고 몰입했다. 그 결과, 졸업 후 동년배들과 EQ 지능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 입대 전까지 ‘100일 프로젝트’를 통해 신경증과 부정적인 습관을 뿌리째 뽑는 것을 목표로 두 배, 세 배의 강도로 훈련을 진행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나는 나의 행동에 확고하게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7년 동안 성격 개선과 자기 변화를 위해 온전히 헌신했다. 요즘에는 마인드 힐링이나 테라피 같은 의미로 열심히 훈련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헛된 시간이거나 후회스럽지 않느냐고 묻지만, 나는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단호히 대답한다. “중, 고등학교 시절은 내 생애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린 시기이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라고 말이다.     


  나는 22살 때 해군 병으로 입대했다. 그 결정은 하얀 해군 정복이 정말 멋있어 보였고, 친구 상필이가 군 간부 부사관으로 입대한 영향으로 나도 해군에 들어가고 싶었다. 군에 입대한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조직 리더십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상필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부사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때를 계기로 부사관이 멋진 직업이라는 확신을 갖고 망설임 없이 지원하여, 1997년 9월에 부사관에 신분전환으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나는 군 생활 5년 만에 군 간부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IMF 시기로 경제가 매우 어려웠고, 더욱이 공무원과 군 간부의 직업이 인기를 끌면서 매년 신규 부사관 지원자 수가 2~3배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국방부에서는 함부로 군인을 명예퇴직 시킬 수가 없었기에, 첫 번째 시범으로 단기 복무자 중 폭행, 음주, 사기 등의 전과나 기록이 있는 자를 1순위로 전역시키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부사관 지원자들은 임용 전에 평가시험을 치러야 했다. 총 23명이 지원했고, 나는 그중 22등을 차지했다. 중, 고등학교 때 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신경증과 사회 불안 장애에만 집중했기에 공부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의 임용 평가시험은 난도가 높지 않았기에, 효율적으로 공부했다면 중상 등수는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22등을 했고, 결국 장기 복무 신청에서 낙방했다.     


  나는 임용 평가시험 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신한다. 정말 목숨 걸고 공부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부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중, 고등학교 때 학생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교과서 대신 화법, 화술, 커뮤니케이션 같은 자기계발 책을 읽고, 문제집을 푸는 시간보다 스피치 훈련을 위해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공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나는 일반 병에서 부사관으로 신분전환 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는 의욕이 강했다. 단지 부사관에 도전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는 사명감을 갖고 평생직업에 도전한 것이기에 그 열정은 대단했다. 그러나 공부라는 게 의욕이 충만하다 해서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공부라는 것은 반드시 법칙이 있기에 결코 쉽지 않다.


  내가 치른 두 개의 시험은 모두 암기 과목이었다. 암기 과목은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세부적인 부분을 반복적으로 복습하면서 암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기출문제를 보며 중요한 내용을 숙지하고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방법은 모른 채 의욕만이 앞선 나머지, 처음부터 한 과목당 20~50페이지를 100% 암기한다는 목표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에는 피로감에 지쳐서 한 권을 다 보지 못한 채 시험을 치렀다. 또한, 무조건 많은 시간을 들여야 되는 줄 알고 밤마다 잠을 안 자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며, 그러다 보니 낮이 되면 피로감이 몰려들어 수업 시간에 졸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교관에게 꾸중도 자주 받았고, 시험에 나올 만한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어도 조느라고 놓치기 일쑤였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1, 2등을 차지한 동기의 책은 아주 깨끗했고 밤새워 공부하지 않아도 항상 성적이 좋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매우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공부하길래 그렇게 시험을 잘 보니?’라고 물었는데, 그들의 대답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태연하게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나도 학창시절에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떠올리며 따라 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안간힘을 다해 공부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엉망이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들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공부 방법이 어느 정도 몸에 배었다는 것을 교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는 전연 후 공무원 시험 수험생을 2년 정도 했는데, 그때 인문계와 이과계의 공부량 차이와 방법이 얼마나 큰지 온몸으로 실감했고, 그때 나는 공부의 기술을 완전히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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