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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수치심 깨트리기 훈련1

삼단쓰레기통 사건(내가 변해야 상황도 변한다)

  당시 행정 직렬은, 행정 및 인사를 담당하는 직렬로 매우 인기가 높은 직종 중 하나였다. 내 첫 부임지는 군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의 행정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군무원과 현역 군인 40여 명의 모든 행정 업무를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얼굴만 내세워 놓았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군무원 신 주사님과 해군 대위인 강 과장님이 맡았다. 다시 말하자면, 행정장은 나였지만 나는 행정 일을 할 줄 모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는 모든 업무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나 혼자 행정 직렬 부사관이었다. 다른 선배들은 대부분 경리 직렬이고 나머지는 전자, 전기 직렬이었다. 그래서 항상 외로웠다. 무엇보다도 운이 안 좋으면 왕따당하거나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확률이 높다는 행정 선배들의 말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실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먼저 머리를 숙이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이가 어리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무원이나 다른 직렬의 선배들이 나를 수병(水兵)과 동등한 취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령부 인사과에 있는 동기들은 행정 선배들이 6~7명이 되기에, 첫날부터 공문서 기안, 발송, 접수, 각종 표창 공적서 작성, 진급 심의회, 월말 정산 등과 같은 업무를 기본부터 차례대로 배웠다.

“이 하사? 수발소에 가서 빨리 문서 받아와.”

“김 수병(水兵)은 어디 갔습니까?”

“내무대에 청소하러 갔나 봐. 암튼 시간 없으니까 이 하사가 빨리 갔다 와! 갈 사람이 없어.”

하지만 1년 동안 내가 담당한 업무라고는 사령부 본부 행정실 수발소에서 우편물과 공문서를 수령하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더 흘러도 배우는 게 없으니 바뀌는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무능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들은 항상 나를 무시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나는 전자 문서 공문서 기안을 작성해 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지만 군무원 신 주사가 어느새 나타나서는 나를 몰아세웠다.


  “이 하사! 비켜. 너 공문서 기안할 줄 알아? 타자라도 잘 치면 내가 가르쳐 줄 텐데, 100타도 못 치지? 너 행정학교에서는 몇 등 했어? 성적이 안 좋아서 여기로 온 거지? 자고로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어. 모르면 도태되는 거야.”

“…….”

“에휴. 공부 좀 하지 그랬니. 너 언제 중사, 상사, 원사 달래? 사령부 동기들은 1차 진급인데 말이야. 쯧쯧쯧.”


  당시 나는 신 주사가 행정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는 공문서 접수와 발송하는 심부름뿐이었다. 나는 하루빨리 이곳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더 크고, 더 높고, 행정 대선배들이 모인 사령부 인사 행정과에서 체계적으로 일을 배우고 싶었다.

부임한 지 2년이 지나면서 내 안에서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계급만 조달부 행정장이지, 내가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덜컥 타 근무지로 발령이라도 나면 나는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녁 일과가 끝난 후 매일 타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곧 300타 이상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 하사! 빨리 수발소 가서 공문서 찾아와.”

그날도 역시 행정 군무원 신 주사는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김 수병 찾아서 보내도록 할게요.”

“뭐? 아, 지금 갔다 와! 지금 김 수병은 없잖아. 그러니 이 하사가 움직여. 급해!”


  그날도 어김없이 신 주사는 나를 심부름꾼 취급하듯 부르고, 나는 너무 화가 났다. 군무원이 현역에게 명령을 한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더 이상 신 주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남포동에서 대중 앞에서 스피치 훈련을 하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 없었다. 신 주사는 내 직속상관도 아니고 군법으로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황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일을 해결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출입구 앞에 있는 철로 만들어진 분홍색, 노란색, 하늘색의 3단 쓰레기통 앞에 섰다. 그러곤 그 쓰레기통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쓰레기통이 넘어지면서 엄청난 소음을 일으켰다.

콰과과-콰과과-콰과광!!


  사무실에 있던 행정 군무원 4명, ROCT 경리 장교 2명이 너무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소음을 들은 다른 부서의 사람들도 너무 놀라 몰려왔다. 나는 과거에 남포동에서 군중을 향해 외쳤던 대중연설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 입대를 했지, 군무원 시다바리나 하러 온 줄 아십니까?”

직무실 안에 있던 직속상관인 해군 사관학교 출신의 강 대위님도 소리를 듣고 나왔다.


  “이 하사! 내 방으로!”

나는 강 대위님의 직무실로 들어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고했다. 이곳에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나의 할 일은 공문서 찾아오는 심부름뿐이며 더 이상은 자존감이 무너져서 이대로 지낼 수는 없다고 말이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할 일을 빼앗기는 것은 너무도 불공평했기에 울분을 토해냈다.

내 말을 다 들은 강 대위님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내 나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전자결제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야. 이 하사가 조달부 행정장이니, 이제부터 모든 전자문서 결재를 내 대신해. 그리고 각종 행정, 인사 업무도 직접 기안, 결재해서 발송하고, 수발도 이 하사가 가지 말고 김 수병(水兵) 시켜. 이 하사는 조달부 행정장이니까 행정, 인사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해. 알았어? 수병 없으면 조달 부장님 당번이라도 시켜.”


  순간 감동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더 이상 참고 지낼 수 없어서 내질렀지만, 내 의견이 이렇게 쉽게 전달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감격도 잠시, 나는 실제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고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이러하지만, 실력은 볼품없습니다. 하지만 알려주시면 열심히 배우고 익히겠습니다.”


  강 대위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러곤 문을 열고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주목! 앞으로 모든 전자결재는 행정장 이남호 하사가 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전자결재나 공문서 결재를 저에게 올리지 말고 행정장 이남호 하사에게 전달하세요. 그리고 신 주사님 행정장, 이 하사에게 모든 행정업무를 인수인계 하세요. 신 주사님은 조만간 타 부서로 발령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본격적으로 행정 업무를 배울 수 있었고, 3개월 만에 모든 행정 인사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 주사는 곧 타 부서로 발령이 나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변하자 상황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다. 예전에는 나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가 명령식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청유형으로 바뀐 것이다.

“행정장, 이것 좀 처리해 줄 수 있을까?”

“행정장, 미안한데 휴가 처리 좀 해줄 수 있겠어?”


  그렇게 내가 바라고 원했던 행정 업무를 모두 인수인계 받았고, 1년 후 부대급 사령부 인사행정에 발령이 나 그곳에서 내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는 군을 전역하여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강 대위님의 큰 배려와 신뢰를 잊을 수 없다. 전역 이후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사관학교 출신이었던 그가 전역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까지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참 안타깝다.


  후일담이지만, 신 주사는 다시 행정실로 돌아왔고 후임 자리에 나처럼 성적이 안 좋은 후배가 와서 또다시 그때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조달부라는 것이 성적이 안 좋으면 오는 자리이고 정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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