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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겐 Jul 03. 2024

<제36화> 실전 훈련 테스트5

첫 미팅 (의도치 않은 고백)

한 주의 마무리를 알리는 토요일, 나는 약속대로 동기들과 부산극장 앞에서 만나 소주, 호프 골목방 지하로 갔다. 사복을 차려입은 3학년 선배 한 명이 이미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 4명이 함께 앉아 있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여자들은 차례대로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말했다.


“야, 여자애들이 화장을 해서 그렇지 다들 동갑이니 서로 편하게 대해라.”

선배가 말했다. 뭐? 우리와 동갑이라고? 그런데 저렇게 화장이 진하다니, 충격이었다. 그때, 여자애들 중 한 아이가 가방에서 88담배를 꺼냈다. 당시에 최고로 유행하던 담배였다. 그녀는 선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담배를 쪽 빨았다가 하얀 연기를 훅 내뱉었다. 나는 그때도 담배 피우는 게 익숙지 않았던 데다가 여학생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처음 봐서 눈길을 어디다 둘지 몰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어색한 나머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처음 먹어보는 맥주를 2병이나 마시게 되었다.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딱히 미팅이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는 금세 끝났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집 방향으로 걸었다. 문제는, 내 걸음걸이였다. 빨주노초파남보의 화려한 불빛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인도가 울퉁불퉁하게 보여서 당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상이 아름답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천천히 걷고 싶기도 했다.


내가 자꾸 비틀대자 끝내 친구들은 나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남호야, 괜찮아? 야, 너 많이 취했네.”

“어, 그래. 나 기분 정말 좋아…. 성원아…. 봉길아….”

“야, 이남호! 정신 차려! 집에 가야지.”

“아하하하, 내가? 나 안 취했어. 자, 봐봐. 걸어가 볼게.”

나는 혼자서 걷을 수 있다며 친구들을 뿌리치고는 걷다가 2미터도 못 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친구들은 안 되겠다며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어깨동무를 해서 겨우 걸음을 걷다가 부산극장과 대영극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밝은 불빛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순간 황홀감이 느껴져서 여기가 현실인지 꿈속인지 분간이 안 갔다.


“성원아… 봉길아… 지금 이게 꿈인가? 얘들아… 나 여기 사람 많은 데서 큰 소리로 연설할 수 있어! 나 사실은 대중연설의 달인이야! 너희들은 할 줄 알아?”

“남호야, 왜 그래? 쪽팔려. 그냥 조용히 가자.”

“뭐? 내가 못 할 것 같다고? 야야, 잘 봐. 내가 중3 때 여기 남포동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을 앞에 두고 멋있게 스피치한 사람이야! 자, 해볼게!”

“남호야, 제발… 조용히 가자.”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틀대며 극장 앞으로 걸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이남호는 할 수 있다! 나는 변화할 수 있다! 운명아! 길을 비켜라! 사회 선생님! 저 이남호입니다! 과거의 이남호는 죽었다! 나는 승리했다! 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그러자 동기들은 재빨리 나에게 다가와 부축하고는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자! 봤지? 나 이남호야. 알았지!”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 이남호야. 그러니 제발 입 좀 닫아!”

그동안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애썼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길 한복판에서 고성을 낸다고 행인들의 핀잔도 들어봤고, 소극적인 모습 때문에 친구들에게 무시도 당해 봤으며, 스스로가 못나 보여서 자책도 많이 했다. 그래서 꼭 바꾸고 싶었다. 이 비밀스러운 내 모습을 버리고,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세상에 보이고 싶었다.

“성원아! 봉길아! 너희들이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 있어. 사실은… 소심한 성격을 고치고 싶어서 부산극장, 대영극장, 여기 남포동, 자갈치에서 연설하고 그랬어…. 나 참 마음 아픈 녀석이야. 지금은 많이 변화해서! 너희를 사귀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처음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고 반응하던 친구들은, 곧 내 진심이 느껴졌는지 발길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내 기억은… 여기서 끊겼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나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으로 인해 잠에서 깼다. 그런데 어떻게 집에 왔는지… 어제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한참을 떠올려 본 결과, 띄엄띄엄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시내 한복판에서 고함을 지르고, 친구들에게 내 비밀을 말해 버린 장면이 떠올랐다.

‘아… 이를 어쩌지? 내가 실수했네. 나의 비밀을 말해 버렸으니… 이제 그들을 어찌 보지? 큰일났네….’

첫 미팅은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이후 친구들에게 비밀을 발설하는 바람에 괴로웠다. 친구들이 나를 이상한 아이로 생각하고 내게서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일요일 내내 불안으로 힘들어하다가 내일이 오기 전에 통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용기 내어 전화를 걸었다.

성원이는 길 한복판에서 고함을 지르는 내 모습에 살짝 당황은 했으나 용기 있는 모습이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고치고 싶은 마음에 그럴 수 있다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불안한 생각만 자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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