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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

by 알레

12월. 어느덧 연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오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의 끝자락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숙연해진다. 따지고 보면 연속된 시간의 흐름 중 시작과 끝을 정해 놓았을 뿐인데, 알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분주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40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여전히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솔직히 비현실적이다. 내일이 오는 게 당연하고,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여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더 싣는다. 아직까진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을 것이라는 그저 막연한 기대감 속에 살아왔던 오늘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느끼기 위해 잠잠해져 본다.


글을 쓰기 바로 직전, 랜디 포스 교수의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의 마지막 강연 영상을 보았다. 영상의 말미에 설명하길 그는 췌장암으로 마지막 강연 9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랜디 포스 교수는 강연 중에 이런 말은 했다. 자신은 한 번도 살아온 날들이 즐겁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아니, 오히려 즐겁지 않은 날을 상상할 수 없다고. 임종까지 그는 가족들 곁에서 농담을 건네며 눈을 감았다고 하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1시간 20분 정도의 영상을 보고 이렇게까지 감정이 휘몰아치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무엇이 나를 감격하게 했고, 눈물짓게 했으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웅장한 여운에 사로잡히게 했을까.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로 어제 오프라인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받았던 공통 질문 중에 '만약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면, 내일 하루를 어떻게 보낼 건지'에 대해 적어 보는 것이 있었다. 깊이 생각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짧았지만 망설임 없이 적어 내려갔다. '아이와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서 셋이 함께 먼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영상에 담아 남길 것이다. 언제고 나의 아이가 이 영상 속 장면을 꺼내 보면서 삶의 행복은 주어진 일상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것임을 깨닫길 바라면서.'


삶은 언제나 치열하다. 누군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열광했던 적도 있다. TV 속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늘 역경을 극복해 내면서 원하는 삶을 이루어 낸다. 그들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꼈고 희열을 느꼈다.


치열함은 늘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하루 또는 열정을 불사르는 그런 모습으로만 다가왔다. 단 한 번도 랜디 포스 교수님의 모습처럼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왜 그리 자신을 채찍질하기만 했을까. 근데 더 중요한 건 채찍질에 의미가 더 나아가기 위한 북돋음이 아닌 책망이었기에 늘 나를 작은 상자 안에 가둬버렸다.


물론 이 모든 건 과거의 나의 모습이다.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더 이상 상자는 나를 가두지 못한다. 나는 이미 나를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고 인정했다. 나를 지지해 주는 고마운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 덕분에 그동안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나를 매일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다 언젠가 진짜 마지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게 내일일지 10년 뒤, 또는 그보다 더 먼 미래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영상을 통해 느낀 이 감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졌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마지막이지만, 그래서 아직 나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충만하게 살아가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가 없는 존재라고 믿는다. 자신의 한계는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벽은 꿈을 가진 사람을 막아서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하지 못할 거라 여기는 사람들을 막아서는 것이라고 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결국 벽을 넘어서게 된다.


2023년의 마지막 달. 나는 1년 뒤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이 꿈은 더 큰 꿈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어 줄 거라 믿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아직 꿈을 꾸지 못하고 있다면 진지하게 '마지막'을 상상해 보라. 마지막이 오늘의 당신을 꿈꾸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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