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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Aug 04. 2024

아빠의 로망

아빠가 되면 소소하지만 왠지 느껴보고 싶은 행복의 모먼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이가 조막손으로 아빠의 손가락을 꼭 쥐고 함께 걷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이에게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존재라는 강력한 신뢰를 형성하는 듯 한 기분이 나를 대단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또 다른 건 아이가 완전히 폭 안겨서 잠이 드는 것이었다. 아이의 온몸이 축 늘어져 아빠에게 완전히 기대어버린 느낌. 이때도 역시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하다.


지금 나의 아들은 4살이 됐다. 아이가 좀 더 크고 났더니 아이와 목욕탕에 가는 것도 새로운 로망이 되었다. 물론 이미 여러 번 다녀왔다. 당황스러운 건 아이가 생각보다 사우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놀이를 하러 가도 물놀이보다 온수풀이나 샤워장에 연결되어 있는 사우나에 사 놀길 더 좋아할 정도니까. 어쨌거나 덕분에(?) 이 또한 무난하게 소원을 이뤘다.


한 여름이 되니 이번엔 아이와 곤충 채집을 하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나도 그렇게 동네를 누비며 잠자리, 매미, 사마귀, 심지어 거미까지 잡아서 채집통에 넣어뒀었는데. 정작 어른이 되니 하나같이 귀찮고 굳이 더운데 땀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물로, 아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나의 아버지 덕분에 아이에게 채집통과 잠자리채가 생겨 모처럼 3대가 함께 매미를 잡으러 집을 나섰다. 아마 우리 동네 매미들이 적잖이 당황했을 거다. 요즘 세상에 잠자리채 들고 동네에서 저들을 잡으러 오는 아이가 참 드물었을 텐데. 할아버지의 실력발휘에 아이는 신이 나고, 아빠도 질세라 실력 발휘를 하니 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좋아했다.


근래에 거의 3일 동안은 내내 매미를 잡으러 나갔던 것 같다.


이번 타깃은 잠자리다. 사실 매미보다 난도가 높은 건 잠자리였다. 이 녀석들은 눈치가 참 빠르니 조금만 주저하면 벌써 달아나버린다. 동요에 나오듯 살금살금 다가가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잠자리채를 휘둘러 낙야채 버리는 멋짐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눈치 빠른 잠자리 녀석들 때문에 겨우 몇 마리 잡는 게 다였다.



그래도 재밌었다. 아이와 덕분에 나의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각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에 더위가 무색할 정도였으니.


뭐 이런 걸 가지고 아빠의 로망이라고 부르나 싶기도 하겠지만 요즘 나는 '일상'이라는 시간에 자주 머물게 된다. 언제나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흘려보낸 시간의 이름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가장 소중하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게 바로 그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무가치하게 느꼈던 시간 속에 돌아볼 수많은 추억이 담겨있었고, 마음 깊은 향수가 되어 꺼내어 볼 때면 살포시 미소 짓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봐도 눈시울을 붉히는 건 언제나 거대한 사건을 해결하고 난 뒤 가족들과 만나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장면들이었지 우주를 구하는 순간은 아니었다.


아이를 기르면서 이런 마음은 더 커졌다. 아이의 시간은 어쩐지 더 빠르게만 흘러가는 것 같다. 돌아서면 또 어느새 훌쩍 커버리는 걸 보면 내 욕심에, 내 불안에, 내 걱정에 골몰하느라 아이가 놀자고 하는 외침을 '나중에'라는 한 마디로 거절했던 게 후회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걸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소소한 그 일상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들을 모두 아빠의 로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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