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짓다.' '집을 짓다.' '밥을 짓다.' 언제부턴가 '짓는다'는 동사가 좋아졌다. 짓는다는 행위는 끝나지 않은 여정을 담고 있다. 끝나지 않았기에 어떤 모양으로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무언가를 '짓는' 사람은 고뇌하는 사람이다. 문장을 짓는 사람은 하나의 단어와 한 문장의 표현 앞에서 고뇌한다.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를 쥐어 감싸기도 하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나를 제외한 분주한 움직임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그 한 마디의 희열에 즐거워하는 사람. 그 사람이 글을 짓는 사람이다.
집을 짓는 사람은 또 어떤가. 누군가의 꿈을 구현해 내는 일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에 가깝다. 이들은 가능성의 재료를 엮어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밥을 짓는 것 역시 단순해 보이고 눈대중으로 하는 듯 보여도 나름의 계량이 있고 경험의 근거에 따라 결국 한 끼의 사랑을 짓는 것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삶은 이야기를 짓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이야기꾼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월의 흐름만큼 이야기가 쌓일 수밖에 없으니까.
근래에 나는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듯 지난 3년의 시간을 자주 돌아본다. 3년간 내 안에 지워지지 않는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그간의 내 상태를 분석해 보았다. 분명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자 함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무력감의 늪에 서서히 빨려 들어가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에야 나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를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스토리.' 내가 잃어버린 건 자신감도 자존감도 아닌, '스토리'였다. 동시에 나를 주저하고 지독할 만큼 망설이는 사람으로 탈바꿈시킨 것 또한 '스토리'였다.
문득 과거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의 제일 위층에서는 김포공항의 활주로가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마다 나는 창 너머 멀리 보이는 활주로와 수차례 이착륙을 반복하던 비행기를 자주 바라봤다. 그리고 되뇌었다. '나는 저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오가는 사람이 될 거야.'
훗날 해외 업무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고, 시차가 다른 고객들과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다분히 스토리의 힘이라고 믿는다.
좀 더 과거로 시간을 돌려, 중학생 때부터 아니 그 보다 더 전부터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중학생 때 훗날 나의 모교가 된 대학교의 이름을 나에게 수시로 들려줬다. '나는 그 대학교에 갈 거야'라고.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외국어가 좋아서 외국어에 특화된 대학교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스토리는 나의 걸음을 계속 그 방향으로 이끌어줬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부터 원하던 그 학교에 진학했다.
과거의 기억을 구구절절 꺼내는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스토리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는 믿음을 상기시키는 것과 동시에 표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요즘의 삶의 단 한 가지 원인은 스토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다시 스토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코칭을 통해 다시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곳을 향하기 위한 여정을 그려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무척 기대하는 건 이번에 발견하게 될 스토리는 긴 시간의 표류를 멈추고 다시 나아가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책과 삶을 통해 '스토리'의 힘을 곱씹게 된다. 대구에서의 미팅을 마치고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도 계속 나에게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한 번 만 넘어서 보자.' '이미 능력은 충분하다. 단시 시작기로 마음먹지 안 했을 뿐이다.'라고.
아마 나와 비슷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자신감과 자존감마저 하락한 현재의 나를 돌아보면서 무기력한 상태로 자꾸 빠져들어가는 상태.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의 스토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나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자.
답은 스토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