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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라는 것

‘어디서 어린 놈이’ 라는 흑마법의 유혹....

by alerce Sep 11. 2018


꼰대란 무엇인가. 자신의 구태의연한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구닥다리 사고방식이란 무엇인가. 대부분 유교적 예의범절과 서열을 중시하는 문화를 지칭한다. 사람들은 왜 이 문화를 비꼬는 걸까. 이 문화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와 대립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왜 도대체 사람들은 꼰대가 되는 걸까? 며칠 전의 내 경험에 빗대 글을 적자면, 누구든 나는 꼰대가 아니라고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라고 자신하고 있다면, 정말 그런지 다시 한 번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몇 달 전, 중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학생과 작은 실랑이가 붙었다. 모르고 내가 그 학생의 발을 밟았고 사과를 하고 지나갔는데, 그 학생은 나의 사과하는 말을 못 들었는지 멀리서 뛰쳐와서는 사과도 안하고 가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일단 나는 정중하게, 이성적으로, 재차 사과를 했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못들으셨나봐요..”라고. 그러자 그 학생은 “사과받는 사람이 듣지도 못한 사과가 어떻게 사과죠?”라고 쏘아붙이고는 휙 뒤돌아서 가버렸다. 아마도 내가 사과를 안했으면서 변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참..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 사과받는 사람이 들어야 사과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어찌나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비꼬면서 쏴붙이는지.. 순간 나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 ‘ 새파랗게 어린게 버릇없이... ’라는 생각이 불같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 애들은 너무 곱게 자라서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른다던데..’ 라는 생각이 분노와 함께 솟구치고 있었다. 이성적이라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가치관은 당돌한 여학생의 가시돋친 말이 불씨가되어 뜨겁게 활활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은 재밌게도 내 안에서 며칠간 뜨거운 불로 타더니 천천히 놀라움이라는 재를 남겼다. 돌아켜보니 나는 그 학생에게 버릇없다고 말하기엔 학창 시절 너무나 버릇없던 학생이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어른에게 완벽에 가까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었다. 완벽해야하는 선생님들이 보여주던 감정적이고 서툴렀던 교육이 나에겐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어찌나 눈을 부릅뜨고 바락바락 대들었던가. 때린다고 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그 용기와 투지 (?)는 어디서 나왔던 걸까.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 선생님들은 늘 나를 상대하는 것이 곤욕이었을 것이다. 항상 ‘왜죠?’ 하고 따져들었던 나였다. 나이가 들고 나도 모르게 ‘어린놈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오늘에 이르러서야 선생님들을 이해해보고자 돌이켜본다. 그들은 단지 내 또래의 미숙한 젊은 선생이었고, 같은 부서 부장님처럼 매너리즘에 빠진 늙은 선생이었다. 그리고 그 어딘가의 중간 쯤에 서있는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이 되어버린... 그 뿐이었다. 연금이나 방학때문에 선생님이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은 지금보다 오히려 부장급 선생님들의 시작은 순수했을지도 모른다. 취업이 안되면 선생님이 되었다던 그 시절의 분들이니, 순수는 했을지언정 교육자로서의 질은 잘 모르겠다. 그저 그들은 그렇게 어찌 저찌 살아가다가 세월로부터 어른이라는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다.


나도 그렇기에 더욱 더 선생님들이 이해는 가지만... 반성으로 시작했던 학창 시절을 돌아키는 과정은 나의 버릇없음이 반성이 되기는 커녕 억울했던 기억만 생생하게 했다. 선생님들은 종종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인 학생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자신들도 감정적인 인간이며, 실수를 하기도 하고, 오해를 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았다. 되려 체벌이나 폭언, 때로는 단체 징벌 등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잘못을 빌어야하는 것은 학생 쪽이었다. 이 무슨 비이성적인 상황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꼰대였다.


내가 지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어른이고,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보다 나이가 많아질 수 없고, 그들의 선생님이 될 수 없으니 무조건 지는 논리다. 어린 나는 ‘나이와 권력’ 이 두가지가 왜 길고 치열한 논쟁 끝, 그들이 승리를 쟁취하는 이유가 되는지 납득이 안되었다. 납득이 안되서 따지면 나는 버릇없고 건방진 학생이 되어있었다. 대학교에서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는 쉽게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싸움을 회피하고 승리했다. 단지 회사나 대학교에서는 많은 규율과 제도들이 비인간적인 폭행, 폭언을 방지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성인은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을 인지하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제도적인 틀 안에서 교묘하게 밑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꼰대는 회사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렇기에 인터넷 상에서 우스갯거리로 풍자되곤 하는 것이라라.


나는 꽤 오랫동안 대학교를 다니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과 만날 일이 없었고, 대부분 내가 만나는 집단에서 아직 어린 축에 속했기에 권력의 맨 밑단에 위치하곤 했다. 굳이 권력이라고 친다면 대학교 시절 동아리 장을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동아리를 이끄는 동안 나의 이성을 끈을 놓게 했을 정도로 나쁘게 행동하는 후배는 없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참 고맙다. 그렇다보니 항상 꼰대를 비난하는 글에 공감하며 살아왔다. 나는 꼰대가 아니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실랑이를 가졌던 그 학생을 만나고 나의 확신은 나를 비웃듯이 무의식 속에서 ‘어린 놈이’라는 무기를 꺼내들었다. 나는 깨달았다. 나도 궁지에 몰리자 순간적으로 꼰대가 되었다는 것을. 권력이라는 것은 쉽게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난생 처음 느껴봤다. 이 말도 안되는 ‘어린 놈이’라는 마법의 말은 순식간에 연소자가 무조건 잘못한 상황인 것으로 몰아붙이기에 아주 영민한 마법의 주문이 된다. 그 연소자는 이번 생에서는 나이로는 절대로 내 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을 잃으면 사람은 폭력을 택하게 되나보다. 꼰대질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많이 당해봤으면서도 나의 이성 저편에 그런 생각이 잠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그 학생이 먼저 인간 대 인간으로 시비를 걸었으니 나도 정당방위로 튀어나온 폭력성일 것이다. 맹세코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권력의 밑단인 연소자, 말단 사원, 후배 등은 경험이 부족하기에 미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이가 많다고 해서 성숙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이를, 권력을 무기로 삼아서 후려패는 것은 정말 비이성적인 생각이고 아무런 논리도 없다. 그냥 폭력이다. 이런 것쯤은 요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서 ‘꼰대’가 되는 것은 참 달콤한 유혹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해주는 윗사람, 어른이 있다면 그들은 정말 엄청난 부던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그런 분이 많지는 않지만... ) 과연 후일에 나도 그 대열에 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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