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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Nov 18. 2024

팔랑귀의 댓가

훌륭한 뱃사람의 소양에는 직관, 융통성, 책임감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침착을 유지하는 능력'인 것 같다. 가까이서 본 훌륭한 스키퍼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역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대담함이었다. 반면, 원래 성격도 겁이 많은 데에다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는 즉시 교감신경이 과잉 활성되며 머리가 굳어버리는 나는 스키퍼로서 글러먹었다며 좌절을 하곤 했다. 


이 순간, 내가 겁먹어 얼어버렸다고 해서 상황을 대신 접수해 줄 노련한 스키퍼는 곁에 없었다. 선주는 철인 체력이긴 하지만 이 바람과 이 배의 상태에 관해서는 나의 의견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근처 만만한 바위에 가 부딪힐 상상 따위나 하며 떨고 있었다. 조타가 조금만 바람 쪽으로 치우치면 배가 과도한 힘을 받으며 가속하는 것이 느껴졌고, 그 반대쪽으로 치우치면 붐이 홱 돌아갈 위험에 놓였다. 강풍과 싸우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니 아니나 다를까 이제 파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 강풍을 예상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메인세일을 올리지 않고 제노아만 열고 왔으면 좋았을 일이었다. 세일을 내리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배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 메인세일과 달리, 제노아는 콕핏 안에서 자유롭게 열고 닫고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뒷바람으로 항해할 때에는, 뱃머리 쪽 세일인 제노아만 쓴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기도 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크레센트 시티 만물박사 케빈의 '메인 세일은 무조건 올리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귀가 팔랑였던 탓이 컸다. 


육지에서 70해리 떨어진 먼바다 항해 중 지진 발생, 쓰나미의 충격으로 배가 파손되어 조타 불능의 상태로, '배 스스로 크레센트 시티까지 와 줬다'던 케빈의 일화는 마리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세일링 요트를 타는 사람들에게서는 대자연 앞 작은 존재로서의 겸허함, 변하는 바다 환경에 맞추는 유연함, 한 배를 타는 타인을 배려하는 성향 등 긍정적인 자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머리로 이해해야 할 것이 많은 세일링 요트의 특성상 척척박사의 늪에 빠지기도 쉽다. 듣는 사람 기 빨리게 하는 '아는 체'의 대가들은 어느 마리나에 가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끔 브런치 연재의 형태로 기습하기도 한다. 


외로웠는지, 지루했는지, 지나가던 두 사람을 배 앞에 세워 놓고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던 케빈의 말 중엔 믿을 수 없을만한 부분도 있었지만, 상대는 태평양 쓰나미에 부서진 배를 끌고 생존한 실전의 고수. 그래서 역시 미심쩍었지만 메인세일을 올리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 그러나 이제 와서 팔랑귀를 탓한들 바뀌는 것은 없었다. 


배는 자꾸 돌아가려고 조타대에 강하게 저항했다.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함 때문에 강풍에도 엔진을 끄지 못하고 있었다. 파도를 맞아 크게 흔들릴 때마다 물 밖으로 노출된 프로펠러가 위잉- 하고 공중에 헛도는 소리가 무서웠다. 




이 악몽같은 순간은 언제 끝날 것인가 간을 졸인지 한참이 지나도록 바람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케이프 멘도시노 남쪽의 바다는 네 시간이 넘게 표효했다. 19:00 닻 내림 포인트인 쉘터 코브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나니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널브러져 쉬기 전, 항해 마무리는 해야 했다.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긴 시간 흥분 상태에 있다 겨우 진정한 호라이즌스 호의 엔진룸부터 열어봤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엔진벨트 하나는 터져 날아가 버리고 하나만 걸려 있었다.

 

철인은 피로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작업 끝에 백업 엔진벨트 두 개를 새로 설치했다. 중간에 이유 없이 rpm이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터졌던 걸까. 프로펠러가 물 밖에 나와 헛돌 때 터진 것일까. 혼자 남아 돌아가던 엔진벨트마저 파손 됐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철인은 피로에도 불구하고, 유레카 수퍼마켓에서 사 온 연어회를 썰고 바닷물로 절여 담근 김치 등을 꺼내 저녁도 준비했다.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친 뒤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대충 먹고 자는 일 없이 이렇게 저녁을 제대로 차려 먹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수다를 떨면서 어느 정도 긴장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안전한 장소


쉘터(shelter, 피난처) 코브라는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곳을 항해하는 배를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일 수도, 혹은 피난이 필요한 만큼 해양 환경이 심각하기에 붙은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닻 내리고 밤을 지내기에 배가 안정적일 것인가 불안하게 할 것인가 확률은 반반이었지만, 밤샘항해 없이 케이프 멘도시노를 지나려면 쉘터 코브에 닻을 내리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태평양 여느 열린 바다의 닻내림 포인트와 마찬가지로 쉘터 코브 역시 밤새 배가 많이 흔들렸다. 닻 위치 중심으로 반경을 설정해 놓고, 벗어나면 알람이 울리게 설정할 수 있는 핸드폰 앱이 있다. 그러나 알람이 울릴 때마다 닻 반경을 늘리고, 또 늘리고 하며 다시 잠의 늪에 빠졌다. 기상 알람 스누즈 하던 습관이 여기서도 나왔다. 워낙 피곤했었다. 


순덕이 쉘터 코브에선 인터넷이 안 터질 거라고 했었는데, 정말 통신 환경도 로스트 코스트이었다. 업데이트 된 기상 정보를 받을 수는 없었지만, 어제 마지막으로 본 예보에 의하면 오늘 오전은 비교적 약한 바람, 오후에는 강풍이 예보되어 있었다. 바람이 세 지기 전에 가능하면 빨리 케이프 멘도시노 영향 지역을 빠져나가 포트 브랙에 입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제와 같은 상황을 한 번 더 겪게 되는 상상만으로 어제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한시라도 빨리 입항을 하고픈 조급한 마음에 해뜨기 전 닻을 올렸다. 예상대로라면, 어제는 좀 힘들었어도 오늘 오전은 쉬운 항해가 되어야 할 터인데 쉘터 코브를 빠져나오자마자 배가 무자비하게 흔들렸다. 항해등을 제외하면 앞도, 뒤도 옆도 빛이라는 것이 없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육지가 있어야 할 왼쪽으로 괜히 한 번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해안가에 불 밝힌 집이라도 몇 채 있었다면, 해안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라도 보였다면 얼마나 마음이 놓였을까. 이 두려운 바다에 우리 배 한 척만 외로이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전줄을 배에 고정시키고 배를 뒤흔드는 파도를 맞으며 새벽빛을 기다리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어제의 바다로 인한 트라우마와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가 정면에서 불기 시작했다. 전방의 수평선에 안개 더미가 나타나나 싶더니 금세 시야를 덮고, 곧 추위가 찾아왔다. 실내로 내려가 방한복으로 무장을 하고 레이더를 켰다. 출항 때부터 높았던 파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대체 이 동네는 애 쉬운 게 하나도 없는 걸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졸음이 오는 것은 좀 당황스러웠다.

 

포트 브랙 도착이 머지않은 순간까지 파도는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 상태로 조그만 항구의 바를 건널 수는 있는 걸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바 입구에 거의 접근하자 그제야 파도가 얌전해진 듯해 좀 마음을 놓았다가, 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의 갑툭튀 수직 파도 한방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한 번 더 호라이즌스 호가 고마웠다. 고맙다 호라이즌스. 무겁고 느리지만, 실수에 너그러워서.

 


포트 브랙의 해안선은 굉장히 특이하다. 포트 브랙 마리나는 동네 개천만큼 좁은 노요 강Noyo river에 위치하고 있는데, 태평양으로 바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형 광장같이 생긴 만으로 흘러나온다. 이 원형의 만은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안에 들어가니 웅장한 고대의 성벽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도 들고, 어찌 보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태평양과 좁은 노요 강 사이, 이렇게 중간 완충지대가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만 안에 들어선 뒤에도 강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없을 만큼 강이 작았다. 우리는 무조건 신중하게 간다며 느린 속도로 더듬더듬 강 입구를 찾아 갔다. 뒷 배들은 우리가 답답했는지 계속 추월해 가고, 맞은편에서 출항하는 배는 나오고, 정신이 없었다.

 

노요 강으로 들어서니 나무로 된 수상 구조물 위의 옥외 레스토랑들이 자그마한 강 양쪽을 따라 주욱 들어서 있었다. 태평양의 파도와 싸우다 갑자기 평화로운 동남아 수상가옥 마을로 4차원 순간이동을 한 듯 얼떨떨했다. 굉장히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배를 묶고 나니 13:30. 이제야 긴장의 끈이 풀렸다. 사람 그림자조차 그리웠던 곳에서 이틀을 고생하다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인간적인 바닷가 마을에 도착하니 두 배의 행복을 느꼈다. 우리는 이제 안전한 장소에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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