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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Nov 15. 2024

어부 팸의 둥지를 떠나

아침에 일어나니 큰 어선 하나가 새로 들어와 있었다. 배 이름이 '노아의 방주Noa's Ark', 순덕 팀의 배였다. 어젯밤 순덕이 배에서 꽤 늦은 시간까지 마시다 돌아와 잔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아의 방주는 그보다 더 늦은 시간에 바를 건너 항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눈꼽을 떼고 배 댄 곳으로 가니 순덕 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아랍 왕자같이 생긴 선장 제프가 인파를 헤치고 나오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눈빛도, 손을 쥐는 힘도 장난이 아니었다. 선장 카리스마가 이 정도가 되면 선원들이 알아서 말을 잘 듣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순덕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선장이었다. 


"제프는 마음이 넓어big heart. 마음이 넓은 사람은 뇌가 작아small brain. 난 마음이 넓은 사람이 싫어!"


신참 선원 토마스가 어젯밤 세 번인가 반복했던 후렴구. 어제 대용량 와인과 치즈를 들고 깜깜한 선착장을 걸어 순덕의 배에 다다르니 순덕은 혼자가 아니었다. 영국 배우 쥬드 로를 닮은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머리는 빡빡 깎고 늘어난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입은 청년이 배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름은 토마스, 이곳 유레카 출신인데 순덕의 설득으로 선원 생활을 시작한 수련생이라고 했다. 자상하고 너그러운 순덕을 보고 일을 시작했는데 순덕의 보스가 카리스마 아랍 왕자라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토마스는 이미 꽤 취해 있었고 순덕은 배꼬리에서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 토마스는 우리가 달랑달랑 들고 간 대용량 싸구려 와인 까를로스 로씨Carlos Rossi를 보고는 기겁했지만, 결국 마시던 위스키에 까를로스 로씨까지 더해서, 어제 다 같이 과음을 했다. 인적 없는 선착장, 유일하게 불을 밝힌 어선 배꼬리 앞에 네 명이 서서 새벽까지 게걸게걸하다 보니 속 깊은 얘기도 나누게 되었다. 화제는 의외의 인기남 순덕의 썸녀들, 토마스의 어두운 어린 시절과 가정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달 밝은 밤, 선착장엔 우리 밖에 없었고 여름밤의 공기는 상쾌했다. 


밝은 날 보니 토마스의 팔뚝이 튀어나와 있었다. 장애가 있는 줄 알고 시선 처리에 주의했는데, 알고 보니 어제 취해서 까불대다가 물에 빠져 팔을 다쳤단다. 바닷물에 빠졌다는 애가 어제와 똑같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불과 몇 시간 전 처음 만난 친군데 친한 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젠 마음이 넓은 사람이 싫다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던 녀석, 막상 아랍 왕자 앞에서는 조용했다. 


아랍 왕자에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고기가 남아있냐고 하니 껄껄 웃고는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단호한 동작으로 갈고리를 내리쳐 광어 세 마리를 찍어 던져주었다. 값을 치르고 싶다는 말은 무시하고 그냥 가 버렸다. 알고 보니 도매로 생선을 한꺼번에 넘기기 때문에 개인에게 판매는 하지 않는다고. 아이스박스 안의 고기들은 팀원 나누어 먹으라고 챙겨 놓은 분량이었다. 


토마스가 생선을 손질해 주겠다며 다친 팔을 걷어붙였다. 한국의 회칼과 다르게 생긴 얇고 긴 칼로 우리 생선의 살을 다 발라준 뒤에 다른 팀원의 생선도 손질했는데, 술이 아직 덜 깼는지 자꾸 삑사리가 났다. 그 혜택은 온전히 생선 정리대 앞에서 기다리던 물범과 매운탕 레시피를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돌아갔다.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정 제주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더 이상 귤을 사 먹지 않게 될때야."


우리는 유레카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언제 가나


과음 뒷날 아침이라도 어김없이 기상은 일기예보앱과 함께 했다. 순덕은 최소 열흘간 멘도시노를 지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지만, 예보 추세를 보아하니, 다음 주 목요일은 멘도시노 상황이 순한맛일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예보에 의하면 다음 주 목요일 상황이 악화되는 대신, 내일모레 상황은 좋아진 것으로 보였다. 모레 출항하는 이상적인 경우를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여기서 여섯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케이프 멘도시노와 그로부터 두 시간 거리인 푼타 고르다에 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낼모레 푼타 고르다를 지날 수 있는 시간은 14시 20분이었다.  


06:00, 유레카 출항, 바 크로싱, 이후 6시간 항해
12:00, 케이프 멘도시노 돌아 내려가기, 이후 2시간 항해
14:00, 푼타 고르다에 물 멈추는 시간 20분 전에 미리 도착
14:20, 상황 체크한 뒤 푼타 고르다 지나가기
18:00, 쉘터 코브까지 항해한 뒤 닻 내리고 밤을 보내기
다음 날 아침, 닻 올리고 출항
오전 중 포트 브랙 입항(오후 강풍)


바를 건너 출항할 수 있는 시간과 푼타 고르다 물 멈추는 시간이 이렇게 아름답게 맞아떨어져 주다니 왠지 낼 모레 나가라는 계시인 것도 같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순덕이 근처 세쿼이아Sequoia(큰 침엽수 종류) 공원이 멋진데 구경하러 가겠느냐고 물었다. 팀원 단합대회따위에 우리가 끼는 형태인 줄 알았는데, 출발을 하려고 보니 순덕과 우리 둘 뿐. 유레카에서 지루해할까 봐 굳이 자기 차를 태워 관광 가이드를 자처한 것이었다. 


직선으로 높이 뻗은 세쿼이아 나무들로 유명한 국립공원이었지만, 우리는 각종 베리류를 따 먹는 데 혈안이 되어 순덕의 가이드 루트에 번번이 차질을 주었다. 블랙베리는 말할 것도 없고, 허클베리Huckleberries, 샐먼베리Salmonberries 등 처음 보는 베리들이 구석구석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아무도 따 먹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 방문한 미국 서부 해안지역의 특징이라면, 소수의 아메리칸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백인 이외의 인종을 만날 일이 흔치 않다는 것이었다. 이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배고픈 곰처럼 베리를 따 먹고 있는 두 동양인을 보고는, 지나가던 나이 지긋한 아줌마가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방문객 안내를 하다니 좋은 일 한다고 폭풍칭찬을 들은 순덕이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늘 같은 기분에 같은 태도, 바다 같이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후드티에 같은 바지, 허름한 야구모자 챙에 낚싯바늘 두 개를 끼우고 있는 차림새도 변함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토마스나 순덕이나 단 한 번도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아 이렇게 다른 세계에 사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나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유레카 도착 직후에 출항날로 점지했다가 순덕에게 빠꾸맞았던 그날. 순덕의 예측대로 바람이 심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목요일 아침, 오늘도 눈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어 찾은 핸드폰의 일기예보를 보며 기상했다. 아무래도 내일 출항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으로 보였다. 다른 지표들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NOAA(미국 해양대기청) 예보의 30노트 돌풍 주의 문구 때문에 순덕이 출항을 만류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예보에는 돌풍 주의가 사라져 있었다. 오후 예보에 '소형 선박 주의small craft advisory' 문구가 새로 생겼지만, 우린 딩기나 카약처럼 작은 배는 아니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점에서, 37피트 호라이즌스 호는 소형 선박에 해당한다.)


눈꼽을 떼고 얼른 순덕의 배로 달려가 의견을 물으니, ‘돌풍 주의가 사라졌다면 괜찮을 수도 있는 날’이라는 평. 크레센트 시티의 토미 조언대로 육지에서 떨어져 멀리 돌아가는 대신, 암초와 육지 사이를 지나가도록 짜 본 항로도 핸드폰으로 보여 주었다. 순덕은 전자 해도를 확대-축소하며 점을 찍기 시작했다. 해저지형을 보며 점의 위치를 정하는 것 같았다. 케이프 멘도시노는 미 대륙을 통틀어 지진 활동이 가장 극심한 지점이고 육지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수심이 갑자기 수천 미터로 뚝 떨어지는 수중 절벽도 수없이 많다. 점들을 연결하니 그 절벽들 사이를 최단 거리로 뛰어넘는듯한 항로가 나왔다. 이렇게 항로를 짜는 방식은 해 본 적도 없지만 어디서 들은 적 조차 없었다.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 상태에서 무모하게 케이프 멘도시노를 지날 뻔했다가 순덕 같은 귀인을 만났구나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지막 밤이었다. 아랍 왕자는 노아의 방주 말고도 세일링 요트 하나를 더 가지고 있었다. 오늘 밤은 그 배에서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깜깜하고 텅 빈 마리나에서, 이번엔 아랍 왕자의 세일링 요트 하나만 밝게 불을 밝히고 들썩였다.

 

우리는 내일의 출항 준비를 마친 뒤 인사를 하러 들렀다. 배 안에서 복작복작 모여 앉아 카드 게임을 하다 밖으로 나온 순덕과 작별 인사를 했다. 바로 카드 게임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배까지 함께 걸어 바래다 주는 순덕도 헤어짐이 아쉬운 눈치였다. 유레카의 아름다운 다운타운은 끝내 가보지 못했지만, 유레카 어부 친구들과의 따뜻한 교감이 채워준 시간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05:50. 번번이 헐렁해지는 엔진 벨트 때문에 이젠, 출항 날 아침 루틴에 엔진 벨트 조이는 일이 추가되었다. 지렛대를 이용해 단단하게 당겨 놓고 엔진을 켰다.

 

바람은 거의 없었지만, 엔진으로 예상보다 조금 빠른 11:40 케이프 멘도시노에 도착했다. 이 항해를 시작한 작년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던 그 이름. 막상 그곳을 지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결국 케이프 멘도시노를 지나고 있다니. 왼쪽으로 보이는 케이프 멘도시노는 민둥산 절벽이었다. 여기서 두 시간 거리의 푼타 고르다에 시간 맞추어 무사히 지난 다음에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 구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달아나야 했다. 돌풍 주의보는 사라졌지만 오후에 강풍이 예보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로스트 코스트Lost Coast라고 부르는데, 이름처럼 아무것도 없는 해안 지역이라고 한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가는 101번 고속도로마저 이 험준한 해안 산맥을 통과하지 못하고 75마일 안쪽으로 우회하기에, '잃어버린 해안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완전한 천혜의 자연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휴전선 근처의 DMZ처럼.


오후 한 시가 되자 바람이 세 지면서 파도가 하얗게 깨지기 시작했다. 메인세일은 이미 가장 작은 사이즈로 줄인 상태이고, 제노아 세일도 줄여 배가 너무 빠르지 않도록 속도 유지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14:10, 정확한 시간에 푼타 고르다를 지나는 데에 성공했다. 순덕이 말한 대로 시간 맞추어 오니 정말 바다가 평평했다. 왼쪽으로 악명 높은 고르다 바위Rock Gorda가 보였다. 우리가 무사히 이 어려운 구간을 통과했구나 선주와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고르다 바위를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바람이 급격히 강해졌다. 어-어? 바람이 세지네? ..하고 배 돌려 메인 세일을 내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강해진 바람은 금세 버거워졌다. 세일을 작게 줄인 상태에서도 배 속도가 7.5노트를 찍었다. 예보에 오후 강풍이 좀 있긴 했지만 뉴포트에서 쿠스 베이 가던 날 정도의 풍속이었다. 걱정하지 않고 있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심하다고 되뇌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메인 세일을 내리기 위해 배를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선주가 최대한 배가 느린 각도로 맞추어 조타를 했다. 이 각도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붐이 홱 돌아가며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호라이즌스 호의 풍향, 풍속 계기판은 고장난 상태. 이 긴박한 상황에서 마스트 꼭대기에 달린 풍향계를 계속 올려다 보며 조타를 했다. 가장 작게 축범한 메인 세일을 최대한 열어 바람이 빠져나가게 한 상태에서도 조타대 저항이 매우 셌고, 급기야 느리고 우직한 우리의 호라이즌스 호의 속도가 8.5노트를 기록했다. 조류에 떠밀려갈 때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는 속도에 눈을 의심했다. 공포가 엄습했다.


선주는 뒷목의 통증을 견디며 온 신경을 집중해 조타를 했다. 세 차례나 붐이 거세게 휘둘리려 했지만, 다행히 안전줄 덕분에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배가 바람에 밀려 심하게 기울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선주가 조타하고 있는 조타대를 움켜쥐었다. 콕핏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상태가 두 시간이 넘도록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철인의 체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때 교대를 해야 했다면 과연 내가 조타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두려움이 극에 달한 나머지, 차라리 근처 만만한 바위에 가서 일찌감치 배를 부딪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 로스트 코스트...)


제어 불가능한 바람에 배도 제어 불능, 바로 옆엔 육지. 여기서 난파하면 코스트가드가 올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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