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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Nov 25. 2024

네버 어겐

가벼운 바람에 너울성 파도와 안개가 좀 있었다. 두통과 메스꺼움, 이번 항해 시작 후 처음으로 멀미가 났다. 해류 때문인지 도통 속도가 나지 않았다.


장피에, 조반니의 배와 VHF 통신이 되지 않았다. AIS가 설치된 배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확인해 보니, 이미 한참 앞서있는 데에다 우리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조반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호라이즌스: "우린 07:30 출항했어. 바람은 없고 파도만 높네."

조반니: "여기도 그래. 그래서 배 좀 덜 흔들리라고 우린 메인 세일 폈어."

호라이즌스: "어젯밤에서야 AIS 송신이 고장 난 걸 발견하고 고치려다 실패했어. 앞쪽엔 안개 좀 낫니?"

조반니: "아, 그래서 AIS에 안 보였던 거구나! 응, 시야도 좀 나아지고 파도도 더 너그러운 느낌이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시야에는 없지만, 함께 항해하는 배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우리 상황을 중간중간 체크해 주고, 필요하면 짧은 시간 안에 지원해 줄 수도 있는 이웃 배는 그 존재만으로 마음을 놓이게 했다. 하지만 AIS 송신은 먹통인 데에다 VHF 수신거리 이상 멀어지면 통신할 방법이 없다. 머지않아 핸드폰 신호도 끊길 것이었다.

포트 브랙 -> 하프문 베이


원래대로라면 13:00에 포인트 아레나를 돌 예정이었으나, 그 시간이 15:30으로 늦어졌다. 늦은 오후엔 만용을 좀 부리기도 했다. 어차피 오늘 밤새워 항해할 테니 잠시 엔진 소음으로부터 쉬자며 엔진을 끄고 세일항해를 시도한 것이다. 사람 걷는 속도밖에 나오지 않자 금방 포기했다.


출항도 늦었는데 배도 느려서, 그동안 수십 번 시뮬레이션해 놓은 일정과 너무 벌어지는 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포인트 아레나에서 샌프란시스코 사이 구간은 바람이 다소 강할 것으로 예보되어 있기 때문에, 미리 계산해 놓은 예상 경유 시각과 너무 차이 나게 지나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30분 뒤인 저녁 여섯 시부터 바람이 강해지고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다가 왜 이 늦은 시간에야 일어나는 걸까? 잠깐 일어나는 바람인지 이제부터 추세가 바뀌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메인 세일부터 내렸다.


조반니: "너희들은 밤샘항해로 계속할 거야, 아님 보데가 베이Bodega Bay에서 닻 내렸다 아침에 다시  계속할 거야? 우리는 계속 갈 건데, 장피에는 혼자 항해라서 보데가에서 자고 간대."


조반니의 메시지가 반가웠다.


호라이즌스: "우리는 안 쉬고 계속 가려고 해. 하지만 좀 천천히 갈 계획이야. 메인 세일은 진작에 내렸고, 제노아만 펴고 가는데 지금 4노트 정도 나와. 오밤중에 데크에 올라가서 세일 내려야 하는 상황은 피하려고."

조반니: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여기는 지금 15노트 정도 바람이 불고 있어."


마린 트래픽 앱으로 확인하니, 장피에의 배는 항로를 변경해 보데가 베이 쪽으로 가고, 조반니의 배는 강풍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호라이즌스: "너희 배가 지금 딱 강풍 지역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 근데도 15 노트면 뭐,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리는 태평양의 겁먹은 두 영혼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빵으로 갈래."

조반니: "너희는 혼자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리고 바다 상태가 건강한 것 같으니까 오늘 밤 멋진 야간 항해가 될 거야!"


바람이 점점 강해지는 추세가 계속되었다. 구름으로 덮여 보이지 않았지만, 해가 지고 있는 것인지 점점 주위가 어두워지니 마음도 함께 어두워졌다. 우리의 첫 나이트 세일링. 응원을 주고받는 친구들 배와 함께 가고는 있지만 앞에 어떤 바다가 펼쳐질 것인지 두려웠다.


호라이즌스: "지금 여기 바람이 상당히 센데? 그리고 파도도 부서져. 앞동네 상황은 어때?"

조반니: "이제는 바다가 확실히 나아졌어. 지금 해안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어?"

호라이즌스: "괄랄라Gualala에서 15해리쯤 떨어진 지점이야."

조반니: "지금 너네가 강풍 지역에 들어와 있나 보다. 그래도 계속해서 가면, 밤엔 잦아들 거야."

호라이즌스: " 야, 함께 항해하니까 진짜 좋다."

조반니: "당근이지. 얼마나 든든한데."




시간이 늦어질수록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메인 세일도 없이 제노아를 1/3만 펴고 있는데 이 무거운 배가 6노트 속도를 내고 있었다. 커다란 제노아를 과도하게 말아 줄이니, 세일 모양이 이상해져 힘을 많이 받는 것 같다는 걱정도 들었다. 호라이즌스 호에는 좀 더 작은 스테이 세일도 있지만 올리고 내릴 때 사람이 뱃머리에 나가야 하므로 이런 상황에선 무용지물이었다.


포트 브랙에서 쉬는 내내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추적한 바에 의하면, 오늘밤 10시부터는 감소 추세, 적어도 새벽 1시에는 바람이 많이 죽어 있어야 했다. 조금만 버티면 바람이 다소 누그러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자 바람이 오히려 더 거세질 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조반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호라이즌스: "거기 상황은 어때? 우린 제노아 1/4 만으로 세일링 하는데 배가 7.5노트를 찍고 있어! 타아나 37 한테는 정상적인 상황은 아냐."

조반니: "여기는 지금 18노트 정도야. 우린 메인세일 최소로 줄였어. 이제 곧 드레이크 베이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가라앉을 거야."

강풍구간을 막 통과한 조반니네 배

 

호라이즌스: "부럽다.  너희는 거의 패스했네."

조반니: "응.. 바람이 종종 22노트를 찍네.. 그래도 몇 시간만 버티면 여기도, 너희 배 쪽에도 바람이 곧 가라앉을 거야."


호라이즌스 호는 풍속계가 고장 나 정확한 풍속을 알 수 없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우리가 싸우고 있는 바람이 18노트나 22노트는 아닌 것 같았다. 앞쪽의 조반니 배와  뒤쪽의 우리 배 상황이 많이 다른듯해 불안했다. 밤에 혼자 교대를 설 때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에 음악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조반니의 말을 상기하며 핸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어 보았다.




멘도시노에서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풍하로 향해 세일의 힘을 줄이되, 붐이 홱 돌아가지는 않는 각도로 미세 조타를 하는 상태가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예보에 의하면'이라는 말이 이젠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일기예보 앱과 NOAA 예보 둘 다 틀렸던가, 사전 시뮬레이션 때의 예상 경유 시각과 너무 벌어져 다른 상황을 맞고 있을 것이었다. 해 질 녘부터 이 시간까지 쉼 없이 조타를 했던 선주는 침묵을 깨고,


"내가 좀 정신이 없는 거 같애.."


라고 했다. 묻는 말에 동문서답하는 것이나, 교대를 하고 내려가는 동작이나 뭔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덥석 겁이 났다. 장피에가 말한, 사람 멘탈이 나갈 수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것인가...


조타대에 서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라이즌스의 조타대는 콕핏 중앙의 기둥에 있는데, 그 위로 부서진 나침반이 있고, 우리는 그 위에 아이패드를 고정해, 전자 해도를 띄워놓고 항해를 하고 있었다. 조타수의 얼굴과 가까이 있는 아이패드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강했다. 달도 별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인 데에다 정면의 아이패드의 빛이 눈을 멀게 하자 선주는 멀미에 시달렸을 것이다. 무려 다섯 시간을 그 멀미를 참으며 조타를 하다 겨우 교대를 요청한 것이었다.


험한 바다와 바람이 무서워 조타를 선주에게 미루고 교대를 제 때 해 주지 않은 것이 미안한 동시에, 선주가 녹다운된 상태에서 이 조타를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아이패드 빛이 너무 거슬리는데, 나침반이 없기 때문에 끌 수도 없었다. 조선소에 난입한 난봉꾼이 우리 나침반을 부순 건 아스토리아였는데 왜 여기 오기까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걸까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적응을 하자, 고개를 위로 들고 오일스킨 재킷의 목 부분을 약간 밖으로 빼놓아 아이패드 빛을 가리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러면 비로소 희미한 조명을 받는 제노아가 눈에 보였다. 그렇게 아이패드와 제노아를 번갈아 보고, 가끔 손전등을 위로 비추어 마스트 꼭대기의 풍향계도 확인해 가며 긴장 속에 조타를 했다. 우리 배에 없는 장비가 많구나 하는 생각은 불안을 더했다.


새벽 두 시가 되도록 바람은 변함없이 강해지는 추세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실내에서 눈을 붙인 선주가 교대를 해 주러 올라왔다. 조타대를 넘기고 실내로 내려와, 언제라도 바로 콕핏으로 뛰어나갈 수 있도록 내복, 오리털 파카에 요트복 상하의까지 그대로 입은 채 구명조끼만 벗고 입구 근처에서 몸을 누였다. 이 바다에 선주를 혼자 콕핏에 놔두고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생각과 달리 피곤이 잠을 불러왔다.


한 시간 뒤 핸드폰 알람에 벌떡 일어나 컴패니언웨이 밖의 콕핏 쪽을 쳐다봤다. 바람은 여전히 무서운 소리를 내고 있었고, 좌우로 기우는 배에서 조타를 하고 있는 선주가 보였다.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졸린 것인지, 멀미인지, 멘탈에 이상이 생기는 것인지, 아이패드 위의 해도에서 시작하는 환상이 계속되었다. 전자 해도에서 육지는 노란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노란색의 해안이 꿈틀꿈틀하더니 용으로 변태 했다.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뜨면 땅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잠시 눈에 힘을 풀면 다시 꾸물꾸물 용이 되어 어딘가 날아가려 했다. 전자해도 속의 노란색 용과 눈싸움을 하다 문득 위기감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선 채로 조타하며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려고 큰 소리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려고 했는데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부르는 나도 참 의외였다.

https://youtu.be/2txArOEsLPc?si=64eZsRZ5euBLHvXs

90년대 초 사춘기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미국 아이돌 보이그룹 뉴키즈온더블럭New Kids On The Block, 그나마 뉴키즈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 내 최애곡도 아니던 'Please Don't Go Girl'이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Please don't go girl! You will ruin my whole world! Tell me you'll stay!"
소녀여 가지 마오! 그건 나를 부숴버릴 거야. 안 간다고 말해주오!


30년 만에 처음 부르는 것 같은데 가사도 막히지 않았다. 하필 왜 이 노래인지 모르겠으나 목청껏 소리 질러 불렀다. 다른 노래는 아무리 머리에 힘을 주어 봐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국가도 아리랑도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는 순간, 인생의 마지막에 단 한 곡의 노래가 생각난다면 그 곡이 Please Don't Go Girl일 것인가.. 나름 확실한 취향이 있다고 생각했던 내 음악 감상의 긴 세월이 허무해졌다.


게다가 이 노래는 템포가 너무 느려, 조금 신나는 노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대여섯 번쯤 반복해 부르자 드디어 다른 노래 하나가 생각이 났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이번 노래는 너무 짧은 것 같았다. 나이트세일링 하다 사람이 미칠 수 있다는 장피에의 말이 이제 수긍이 갔다.




도저히 한 시간 이상은 불안해서 잠을 자게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어 한 시간 주기로 선주와 교대를 했다. 새벽 4시가 되니 바람이 힘이 빠지기 시작했으나 파도는 여전히 부서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비가 왔던 것도 같은데 그저 정신이 없었다. 콕핏이 다 젖고 메인세일 붐에서 얼굴로 물이 계속 떨어졌다. 입구 근처의 실내도 바닥이 흥건히 젖었으나 문을 닫거나 할 정신이 없었다.


자다 일어나 입구 근처 바닥의 물을 보고 놀란 선주에게 '빗물이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며 안심을 시켰다.




조반니: "좋은 밤이었길 바래. 바람이 잦아들었고 바다도 얌전해졌어! 우린 이제 밀물을 타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밑을 지나고 있어."

호라이즌스: "해냈구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 우리는 이제 파랄론Farallon 근처고, 하프문 베이로 가고 있어."

조반니: "축하해! 너희도 거의 다 왔네! 고생했으니 도착하면 푹 쉬어."

호라이즌스: "우리의 첫 야간 항해에 함께 해 줘서 고마워. 또 연락하자!"



샌프란시스코 베이 바로 밑의 하프문 베이. 닻을 내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늦은 시간 일어났다. 밖은 여전히 안갯 속이었다. 분위기는 으스스하지만, 이제 저녁에 재킷 없이 콕핏에 앉아 있어도 춥지 않았다.


선주와 나 둘 다 두통과 메스꺼운 증상이 있었다. 오랜 시간 발 묶였던 탓에 의욕만 넘치던 포트 브랙에서 세운 계획에 의하면, 여기서 하룻밤 자고 바로 출항하는 것이 일정이었다. 그러나, 둘 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루 더 쉬면서 일정을 다시 한번 점검하기로 했다. 첫 야간 항해를 3박 4일 연속으로 하겠다는 불타는 의욕을 진화시켜 준 장피에에게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1박 후 바로 출항하겠다는 일정조차 무리였다.


남해 집을 떠올렸다. 집주인 내외가 쪼그려 앉아 밭을 매거나 집 주변을 걸어 다니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편하고 참 좋다는 얘기를 선주와 나누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먼 나라의 얘기 같았다. 느긋한 남해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던 사람들, 미국 오기 직전에 처음 만난 친구들까지 여러 얼굴들이 참 그리웠다. 다이애나와 존도 무척 보고 싶었다.


"우리가 지금 힘든가 보다..."


용기를 내 한 번 야간 항해 경험을 한 뒤에는 이 미지의 세계에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와 정 반대로, 이제부터 야간 항해를 하며 속도를 내 내려가겠다는 부푼 꿈이 바로 꺼져 버렸다. 선주는 이제 세계일주 항해를 안 하겠다고도 선언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야간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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