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만난 많은 교민들이 한국을 떠날 때 불렀던 18번이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18번일 경우가 많았다. 본국을 떠나 외국의 다른 지역에 자치구를 이루며 고립되어 사는 소수 민족 사회가 본국보다 더 오랜 전통문화와 원래의 언어 형태를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본국에서는 시대 변화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문화와 언어가 변화 생성 발전되는데 반해서, 해당 자치구의 소수 민족은 자신이 떠날 때 알고 있던 원형을 보존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있어서 본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는 전통이나 언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덕분으로 한국의 소식을 쉽게 접하고 실시간으로 특정 정보가 업데이트되기는 하지만, 많은 교민들이 대부분 산재해 있는 정보를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취득하기 때문에,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확증 편향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많이 보았다. 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국을 떠날 때 그대로
한국에서야 친구나 동료와의 친교 모임에서 '남의 말은 안 듣고 자기주장만 하는' 중년의 소통 방식이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논리의 허점을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안 되는 현지 교민 모임에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에 대해서 노코멘트하는 것이 더 고립되어 외롭게 살지 않는 현명한 처세이다 보니 고착된 확증 편향에 대한 수정의 기회가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보면 답이 없는 생각을 가진 교포들이 있고, 그분들이 주축이 된 이해하기 어려운 한심한 교포 사회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기쁨조 시절
지금은 직장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젊은 사람들이 술도 예전처럼 많이 마시고 않고, 호불호에 대한 의사 표현이 명확해서 예전 같은 재미가 없다고 했다. 잘 살아남아서 대기업 이사님이 된 친구의 쓸쓸한 멘트였다. 라떼는 말이다, '오늘 저녁 회식' 공지가 뜨면 예외가 없었다. 빠지면 배신이고 직장 생활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회식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아들이 전화를 건다.
"엄마 죄송해요. 갑자기 부서 회식이 있어서 오늘 엄마 생일에 못 갔어요."
엄마가 답한다.
"괜찮아. 아들, 아무 일 없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울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시키면 울었으니까.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소풍 때 어느 강가에서 반 아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아서 한 명씩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앞 순서에 부른 애들의 노래가 엉망이었는지, 아니면, 분위기가 좋았던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하여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밝고 맑은 동요를 반쯤 울먹이며 슬프게 불렀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소풍이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던 나의 데뷔 무대다.
폭탄을 피하는 법
그런데, 나는 직장에 막내로서 적응을 잘했다. 특히, 회식에 적응을 잘했다. 술을 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 당시에는 '못 먹는다'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1차로 간 식당에서는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폭탄주를 낮은 포복이나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잘 피해 다녔다. 전략은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다'이고, 전술은 '폭탄을 피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다'였다. 즉, 추가 주문이나 반찬 추가 등 회식 자리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맡아서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역시'라는 엄지 척이 부상으로 주어지고, 폭탄이 난무할 때 한 두 방을 피할 수 있었다. 초반에 폭탄주 한두 잔을 피하면 마지막까지 생존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
나는 자발적으로 기쁨조가 되었다
2차 노래방에서는 리모컨 담당을 자청하였고, 선배들이 노래를 부르면 항상 옆에서 추임새를 넣거나 기쁨조로 같이 불렀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또 폭탄을 맞으니까. 꼰대 부장이 부른 뽕짝에서부터 서구 지향적인 선배의 팝송까지 커버했다.
무박 2일의 회식
6시에 시작된 회식이 흐르고 흘러 여섯 시간이 지난 자정쯤에 이르면, 회식 멤버들은 어느새 호그와트행 기차를 타고 벽으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 마법파와 손을 마주 잡고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 무한 루프의 대화를 지속하는 협상파와 구석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늘어진 시계같이 소파와 한 몸이 된 행위 예술파로 나누어진다. 그때쯤이면 1차에서 폭탄 한 두방을 피하며 내상을 덜 입은 나 혼자만 의식이 있었다.
달팽이
그때, 모두들 혼수상태였을 때, 피, 아니, 알코올 비린내가 진동하고, 포연, 아니, 담배 연기가 뿌연, 전쟁터, 아니, 노래방에서, 총칼을, 아니, 마이크를 뽑아 들고 불렀던 노래가 '패닉의 달팽이'다. 아무도 귀담아듣는 사람이 없고, "야, 분위기 깨는 노래 할래"라는 면박을 듣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그날 하루도 열심히 생존한 나에게 최소한의 위로로 건네는 마지막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