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친하게 지내는 유럽인 친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호들갑을 떨면서 말한다.
친구: "한국 가족들은 괜찮아?"
나: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
친구: "미사일을 쐈다며."
나: "북한 미사일?"
친구: "그래!"
나: "늘 있는 일이야."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그냥 머리 위로 날아간 거야."
친구: (그래도 걱정스러운 듯이) "별일 없는 거지?"
나: (대수롭지 않은 듯이 웃으면서) "그래, 아무런 문제가 없어."
친구: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 사이에 긴장이 최고조에 있었던 시기였다. 연일 이스라엘 여러 도시의 다양한 장소에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였다는 뉴스 속보가 방송을 타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시기에 이스라엘 출장이 잡혀 있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 Aviv)에서 열리는 IT관련 국제 전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당 행사가 테러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를 두려워한 많은 서방 국가의 회사들이 참가를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 집 건너편에 살고 있었던 진 할머니와 레이몬드 할아버지가 건너오셨다. 영국살이가 쉽지 않았던 우리를 가족같이 돌보아 주셨던 분들이다.
할아버지: "이스라엘 출장을 예정대로 가느냐?"
나: "예"
할머니: "안 가면 안 되냐?"
나: "별일 없을 거예요."
할머니: "그럼, 버스는 절대로 타지 말어." (며칠 전에서도 버스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있었다는 뉴스를 알고 계신 듯했다.)
나: "예, 버스는 타지 않을게요."
할머니: (걱정으로 눈물을 훔치며 안아 주셨다) "정말 조심해."
위 두 장면에 등장하고 있었던 나는, '걱정하는 눈빛의 친구'와 '눈물을 훔치던 진 할머니'와 달리 아무런 감정 이입이 없었고, 그들의 눈물과는 달리 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교사와 선배들의 폭력이 정당한 훈육이었던 학교와 으슥한 골목길에 잘못 들어섰다가는 얻어맞고 돈을 털리던 야인시대의 사회문화 속에서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해 내며 생존해 왔고, 군홧발에 가슴팍을 채이고 M16 개머리판에 머리를 찍히는 군기확립의 군대생활을 견디면서 늘 '현존해 있는 위험'에 긴장하며 살아온 나에게 '잠재적 위험' 따위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로 가는 여행은 어쩔 수 없이 긴장이 된다. 공항의 출국 과정에 모든 금속 물질과 전자기기를 올리고, 금속 버클이 있는 허리띠까지 풀어헤쳐서 공항 검색대에 올리다 보면 위험 물질을 소지하고 있지 않아도 괜히 긴장이 된다. 도착 국가의 입국 과정에서도 혹시나 입국심사대에서 문제가 생겨서 어디론가 끌려가서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상상을 한 번쯤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된다.
이스라엘의 입국은 분위기가 조금 경직되고 질문이 까다롭기는 해도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호텔을 포함한 건물 입구에는 엑스레이 검색대가 있었고 보안 요원이 가방을 일일이 열어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가방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보안 요원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긴장이 되었다.
"야,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사냐?"
같이 출장을 갔던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진 할머니의 부탁대로 나는 자살폭탄테러의 위험이 있다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호텔과 행사장을 오가거나 개인 일정으로 외출을 할 때도 택시를 이용했다. 그래서, 단골이 된 택시 기사가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항상 입었고, 몸집은 운전석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났다. 그의 택시는 구형 검은색 벤츠였으며, 에어컨을 틀지 않고 앞 뒤 창문을 활짝 열고 익숙한 듯이 지름길을 요리조리 찾아가며 쌩하니 달렸다. 어느 정도 서로가 편해졌을 때 물었다.
나: "이스라엘은 위험하지 않냐?"
택시 기사: "노 프러브럼"
나: "자살폭탄테러 이런 것이 막 일어나고 그러잖아?"
택시 기사: "노 프러브럼"
나: "그럼 여기 사람들은 걱정 안 하고 사냐?"
택시 기사: "노 프러브럼"
이스라엘 체류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비롯한 몇몇 도시를 방문하고, 현지인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외지인의 걱정과 두려움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았다. "삶이 위험하지 않느냐? 걱정하지 않느냐?"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노 프러브럼"
진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한 그 땅의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무덤덤하게 살고 있었다. 이는 두 가지 경우인데, 첫째로, 현지의 상황을 외부에서 과장하여 전달하고 있거나, 둘째로, 현지의 상황에 현지인들이 무감각해지거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된다. 그중에서 나에게 깨달음을 준 것은 우리 인간의 지각과 감각의 무뎌짐에 대한 인식이었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생물학에서 역치와 실무율이라는 용어가 있다. 역치란 감각 세포에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한의 세기를 말한다. 실무율은 생체에 자극이 왔을 때 일정한 강도에 이르지 못한 자극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후각은 '선택적 피로 현상'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쉽게 둔감해지는 것이다. 같은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매초 2.5%씩 민감성이 감퇴되어 1분 이내에 70%가 소멸된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향기를 맡거나 고약한 냄새를 맡거나 간에 오랫동안 냄새를 맡게 되면 냄새를 맡는 능력은 곧 마비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냄새가 고약한 화장실에 앉았을 때 처음에는 코를 쥐고 있다가도 잠시 후에는 한결 편해져서 손을 놓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화장실의 고약한 냄새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는 우리의 후각 기능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에 70년 동안 남북한의 긴장과 대치는 국내적으로 대외적으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고약한 냄새를 풍겨 왔다. 때로는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돌리기도 하였지만, 70년을 지속적으로 맡아 온 냄새에 마비가 되어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미사일이 하늘 위를 날아다닌다고 해도, 핵실험이 저 어디에선가 진행되었다고 해도 '그러려니'한다. 문제는, 고약한 악취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70년간을 무수한 직접적인 위험 속에 노출되어 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나 가능성이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이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진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리 앞바다에 닥쳐 올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나 가능성이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그렇게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위험에 대한 우리의 감감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우리나라의 반응을 본 나의 이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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