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체험 카페와 성노동 산업의 교차 (3)
1화: https://brunch.co.kr/@alia/144
2화: https://brunch.co.kr/@alia/152
앞선 글에서는, 넓은 개념의 ‘돌봄’으로 재화를 생산해내는 비인간동물과 성노동자의 교차지점을 보았다. 이번에는 이들이 얽힌 산업을 폐쇄하게 만든 사회인식과 제도의 사례에 대해 볼 것이다. 정확하게는, 사업장 폐쇄로 인해 방치되거나 내쫓겨지는 이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게 되는지 보려고 한다.
성노동자들이 단속의 위험을 감당하며 일하는 성매매업소들. 동물을 착취하는 전시 사업장이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은, 이들이 더 안전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마땅한 해결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장 운영되는 사업장들을 그저 폐쇄한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것인지. 그 사업장들이 폐쇄된 이후 그들의 삶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되물으려 한다.
기본적으로 성매매업소와 동물 체험-전시사업을 하는 곳들은 ‘개인사업장’ 이기 때문에 코로나 등 경제적 적자를 이유로 폐업을 할 때도 있으나, 또 한가지. 다른 이유로 폐업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제도 등 권력의 개입이다.
먼저 성노동자들의 집결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성노동자들의 삶터이자 일터인 집결지의 폐쇄는 성매매특별법의 영향을 받는다.
‘성매매특별법’(이하 성특법)은. 2004년 군산 대명동 화재참사를 기점으로 마련되어 성매매 여성들이 보호받을 권리, 감금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렇게만 들으면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앞장서서 제정을 요구해야 할 것 처럼 느껴지지만, 결과는 달랐다. 성특법 시행으로 인해 사업장의 단속이 심해졌고, 생계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성특법이 시행되던 2004년 집결지의 성매매 여성들과 업주들은 ‘노동할 권리’를 주장하며 성특법을 반대하기 위해 대규모로 운동을 조직하여 거리로 나서게 된다.
성특법의 시행과 단속강화는 성노동자들을 무력한 ‘성매매피해자’ 프레임에 갇히게 만들었다. 성특법의 시선으로 본 사회와 여성단체의 눈에 성노동 종사자들은 ‘끔찍한 상황에서 구원받아야 할 피해자’, ‘업주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 이었다. 이들은 성노동자들에게 스스로의 삶에 대해 결정할 힘이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강력한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진 주체들이 있었다. 성노동을 직업으로 선택하여 살아가고 집결지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삶의 맥락들이 있었다. 종사자와 업주들은 노동권 사수와 성특법 유예를 위해 조직적으로, 그리고 아주 간절하게 싸웠다. (참고할만한 기사)
이들의 생존권 요구, 직업인으로 인정해달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2016년 성매매특별법은 개정 없이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시대적으로도 성매매 집결지는 ‘도시의 흉물’로 전락하였으며, 교육에 좋지 않은 공간.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공간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성노동자들은 더 이상 ‘시민’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곳을 이용하는 ‘구매자 시민’들이 있기에 유지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수의 여성권리를 위한 운동. 즉 ’건전한 성도덕을 위한 운동‘ 을 전개하는 이들은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은 지방자치단체의 도시재개발사업을 근거로, 집결지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성매매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새 삶을 준다’는 명목으로 포장된 철거현장에서, 정작 노동자들의 의견은 묵살되기 일쑤다. 실질적으로 집결지가 밀려야 하는 이유는 빈민촌이 철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이 얽힌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등포, 수원, 인천 등 집결지가 위치한 곳은 대부분 역세권에 위치한 ‘노른자 땅’ 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 입장에서는 집결지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집결지가 철거되면, 건물ㆍ토지 소유주들과 일부 포주들만이 땅을 팔아넘겨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된다. 집결지의 자리에는 이후 아파트단지나 신도시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꼭 부동산의 이익 뿐 아니더라도, 집결지를 ‘밀어버린’ 시장은 여성들을 구제하고, 도시의 흉물을 제거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목적을 위해 폭력적인 갖가지 방식으로 집결지의 삶들은 말살당한다.
2018년 옐로하우스 철거 진행시에도, CCTV 불법 촬영, 포크레인과 같은 중장비로 위협하며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 사람이 안에 있는데 건물을 훼손하는 행위와 같은 비인권적 일들이 일어났다. 철거현 에 사람이 있었던 이유는, 떠날 수 없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철거가 진행되었을 때, 일자리와 집을 잃게 되는 이들에 대한 대책은 미흡하거나 거의 없다. 집결지가 사라졌을 때 함께 일자리를 잃게 될 다른 사업장들에 대한 대책 역시 없다.
지금껏 도시빈민으로서 집결지종사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이 철거라는 또 다른 내몰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자활’이라는 그럴듯한 대안을 제시받는다. 하지만 성매매여성쉼터라 불리는 곳에서는 최저시급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일하며, 비누만들기, 네일아트 등 ‘여성화된 저임금 노동’만을 요구받는다. 그렇게 전에도 속할 수 없었던 ‘정상성’ 으로 밀어넣어지기를 기대받아야 한다. 혹시 다시 성매매를 하지는 않는지, 지속적으로 감시를 당해야 하기도 하기도 하고. 탈성매매에 실패해 다시 성매매업종에 종사하게 되면 지원금을 뱉어내야 하기도 한다.
이런 자활지원마저도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지원대상에서 배제되어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 2021년 기준 창원 서성동집결지 에 남아있던 성매매 종사 여성 80여 명 이 가운데 창원시 자립 지원을 받은 여성은 10여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여성들이 탈성매매에 성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결국 경제적, 시스템적으로 부족한 자활지원을 제시받고 대책없이 지금까지 꾸려온 삶의 보금자리를 잃게 된 이들은 다시 업종을 변경하거나 다른 집결지로 흩어지게 될 뿐이다. 이는 사회가 실은 본래의 목적처럼 보였던 ‘여성 권리를 위한 운동’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노동자들은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남겨져있으며, 더더욱 빈곤해진다. 사라지지 않으며 게속 대를 이어 존재하고, ‘꼴보기 싫다’는 이유로 사라진 집결지에서 내쫓겼을 뿐이다.
2023년 4월 지금도, 파주의 용주골 집결지에서 생존권을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시에서 밀어버리려는 연풍리 집결지를 노동자들은 일할 수 있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준 집결지를 ‘안전지대’라고 부르고 있으며, 강경하게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파주 용주골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기사링크를 아래 첨부한다. 이들의 생존권 투쟁을 위한 움직임이 감추려는 권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지역 신문을 넘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성매매업종에서 고용되고 있는 성노동자들의 처우나 노동환경이 안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노동하고 있는 환경을 바꾸는 것을 모색해야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성노동자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문제가 있으니까 그냥 없애버리자’는, 노동하는 당사자들의 삶의 맥락을 존중하지 않는 대처이다.
성노동자의 경우 성매매특별법과 사회적 낙인, 제도의 당사자 목소리를 제거해버리는 단속과 처벌이 업장을 폐쇄하기도 한다면, 동물사업장의 경우에는 21년 발의된 동물원 관리 종합계획으로 인해 야생동물카페가 폐쇄, 금지된 바 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던 2017년, 서울대공원에서는 시베리아호랑이 크레인이 죽었다. 서울대공원에서 태어나 원주의 드림랜드로 이송된 크레인은 몇 년 후 그곳의 심각한 경영난 탓에 최소한의 영양관리와 의학적 처치도 받을 수가 없었다. 폐업을 앞둔 상황에서 그곳을 관리하는 사육사는 단 한 명이었으며, 동물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원주 드림랜드의 폐업 후 유럽불곰은 곰 사육업자에게 넘겨진 뒤 죽은 채 발견되었으며, 천연기념물 수리부엉이는 부산 기장군의 한정식 식당으로 팔려가 전시되었다.
동물원이 폐업한 후 무책임했던 동물들에 대한 처우는 동물카페/전시 산업에서도 여실히 이어졌다. 한 예시로, 2018년 충북 청주시에서 폐업한 애견카페에서 강아지 17마리가 방치돼 있었고 이중 3마리가 사체로 발견됐다. 강아지들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폐사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뉴스가 있다.
이때 당시 현행법상 동물전시업 등록 시 '폐업 시 동물의 처리계획서'를 첨부해 제출,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의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명시돼 있지 않아, 관련 업체들이 폐업하면서 동물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사례가 빈번해 실효성이 떨어졌다.
이에 2019년. 동물원ㆍ수족관이 휴업 혹은 폐업을 하려는 경우 보유 동물이 다른 곳에 양도되도록 하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동물원이 아닌 개인 소유의 동물은 지자체가 관리·감독하는 규정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많은 동물 사업장이 폐업했다. 문을 닫은 개인 전시산업장의 동물들이 갈 곳을 잃었다. 2019년, 라쿤이 서울 길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홍익대학교 부근 건물에서 라쿤이 포획됐다. 라쿤 카페가 있던 건물이었다. 서울 중구에서 이어 또 다른 라쿤이 잡혔다. 이후 2차례가 더 라쿤이 더 포획되는 일이 있었다. 동물카페들이 문을 닫고, 무책임하게 동물들을 유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새로이 발생했다기보다는, 이미 동물카페가 생기기 시작한 시점에 유기 사건의 연장선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야생동물이 탈출하거나 유기되었다가 사람에 의해 발견되게 되면, 공무원에 의해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므로 ‘국립생태원’으로 이동된다. 공고를 통해 원래 주인을 다시 찾고,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개인에게 분양된다. 만약 분양되지 않을 경우엔 안락사된다. 외래에서 들여온 야생동물은 한국 자연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므로 보호나 안락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입장이다. 이는 곧 갇혀살던 동물들이 돈이 되지 않자, 본래의 생태계와 맞지 않는 환경에 버려지고. 또 다시 계속 공간을 달리하며 갇히고, 결국 입양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는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21년 국회는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의한 법률,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의결했다. 주요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동물원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제 야생동물을 전시하려면 일정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즉 개인이 운영하는 야생동물카페는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허가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검사관 제도를 도입해서 검사관이 사육환경을 직접 가서 평가하게 되었다. 그 ‘검사’라는 것 역시 여전히 인간중식,편향적인 것이고 여전히 ‘허가받은 곳’에서는 동물을 가두고 괴롭히는 일이 가능하다는 한계가 명확하며, ‘지금까지 이정도 감사도 하지 않고 개인들이 동물사업장을 운영하게 내버려뒀다는 건가‘하는 분노도 일지만 우선 조금 더 법안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기존 동물보호법은 동물이 학대를 당한 후 질병, 상해가 발생해야지만 처벌할 수 있었지만 이번 개정에서는 금지행위(동물원수족관법 제15조)에 올라타기, 만지기, 먹이주기 등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 공포, 스트레스를 가하면 안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유리벽에 구멍을 뚫고 먹이를 주는 것이나 동물에 올라타는 것, 사육사가 없는 상태에서 만지게 하는 행위들이 동물원에서 금지되게 되었다. 이 조항은 그간 육체적 직접적 행위만 학대로 봤던 것에서 나아가 동물의 정신적 복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라고 한다. 동물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 감응력을 인정한 건데, ‘동물복지 기준 전체로 놓고 보면 굉장히 큰 승리라’ 는 여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애초에 동물을 좁은 공간에 가두고 사람과 하루종일 접촉하게 하는 것 자체가 학대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의문이다.
어찌되었든, 야생동물카페는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동물카페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조금씩 부정적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지만 이 개정 역시 당연히 크게 잘 시행되고 있지 못하다. 여전히 병에 시달리고 죽음에 이르고 있는 전시동물들의 사례가 연이어 보고되고 있으며, 법 자체로 보더라도 잘 된 개정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여전히 인간이 동물을 가두고 영리대상과 수단으로 삼아도 된다는 기존의 인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또 ‘야생동물’이라 규정되는 동물을 다루는 개인 사업장에 한해서만 제한을 두고 있다보니 여전히 ‘반려동물’과 ‘가축’을 대상으로 한 전시, 체험 산업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도 내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 돼지, 페럿, 새, 토끼, 개, 고양이등의 동물을 전시,체험하게 하는 개인 사업장은 동물원 등록 없이도 운영될 수 있으며 검사를 받지도 않는 사각지대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취급’되고 있는 동물카페, 사업장이 폐업한 이후에 이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만약 운이 좋아 무책임하게 버려지지 않아 지자체에 신고 되고, 절차대로 인도된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이들이 가게 되는 곳은 결국 또 다른 보호소, 혹은 다른 동물원일 것이다. 그러다 입양이 되지 않거나 처치가 곤란하게 되는 경우, 야생동물과 같은 식으로 안락사 당하거나 도살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양 카페에서 뽀송한 털을 뽐내며 예쁨받던 양은 양고기가 되어 팔린다. 고양이 카페에서 예쁨받던 고양이는 병에 걸리면 유기된다. 야생동물카페는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옛날에 갔던 야생동물카페에서 만났던 이구나아, 라쿤들은 ‘주인’을 찾지 못해 죽임당했다.
그래도 동물카페를 그냥 없애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동물카페에서 계속 수탈,착취당하는 것이나, 동물원이나 보호소에서 살다 안락사되는 것이나. 결과가 크게 다르다고 생각되는가?
그들은 성매매 사업장과. 동물사업장이 그 이름을 갖게 한 이들이었다. 비로소 그 장소가 정체성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재화를 만들어내게 하는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업장이 폐쇄된 ‘이후’에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들은 어떤 처우를 받게 되는지에 대해 그들을 소비하던 사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료를 찾을 때 더욱 실감이 났던 것 같다. 집결지를 폐쇄한 후 얼마나 같은 공간이 멀끔한 신도시가 되고 친화적인 공원이 되어서 많은 이익을 창출해냈는지에 대한 기사는 넘쳐났으나, 집결지가 허물린 후 그곳의 노동자들이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 어디로 가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중요하게 보도되고 있지 않았다.
동물 전시,체험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들의 말에 따르면 ‘비윤리적인 동물사업장에 대한 제도개선’을 해냈고 이제 동물 사업장에 부채감을 내려놓고 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문을 닫게 된 수많은 야생동물 사업장들의 야생동물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왜 여전히 동물원과 동물카페의 동물들이 정형행동을 반복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보값도, 사람들의 관심도 현저히 부족했다.
물론 이 두 산업을 대비하고 함께 이야기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고, 다르게 구분되어야 할 차이점이 명확히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짚고 있고, 분명히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은 ‘노동’이라고 짚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인간동물이 전시, 체험 산업에서 ‘돌봄’을 행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본디 그들이 원한적도 없는 것이고, 곧 ‘수탈’에 가깝기 때문에 이 두 케이스가 완벽하게 함께 이야기되기는 힘들다는 부분이다. (사실 글을 쓰면서 더 확실하게 깨달은 부분이다.) 어쨌든 이번에 중요하게 짚고 싶었던 지점은, 제도가 두 산업을 복지라는 이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당사자들을 주체성이 없는 취급을 하며, 정작 가장 중요한 주체들의 요구와 삶에는 관심이 없는 책임감 없는 대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도와 제도를 만드는데 영향이 있는 이들은 성노동자와 비인간동물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역량이 있고, 충분한 의사가 있다고 보지 않고 있었다. 성노동자는 무력한 착취 피해자, 비인간동물은 인간의 도움을 필수로 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자라는 프레임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으며, 이렇게 주체들의 의견과 삶을 존중하지 않고 묵살하는 태도가 계속해서 다른 문제들을 낳고 있다. 착취적이고 위험한 산업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도 당연히 안되지만, 존재하는 이들의 삶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이익논리로, 혹은 시혜적인 태도로 문을 닫고. 그렇게 갈 곳을 잃은 이들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지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늘 그들은 자신이 의견 없이 끌려다니는 존재도,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표출해왔다는 것이다, 삶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주체로서 늘 저항해왔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휘두르려고 할 때 그들은 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해왔다. 성노동자들은 거리에 나와 꽹과리를 두드리고 벗은 몸에 물감과 기름칠을 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라’ 외쳤으며, 인간과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물들은 온 몸으로 유리벽을 찧고 우리를 부수며 부당함을 표현했다.
자본에 의해 쫓겨나고, 가난해지고, 또 다시 갇히고 죽임당하는 이 끔찍한 연쇄는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정말 필요한 사회 구조가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제도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단순히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 인정이 첫번째로 필요한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도덕적인 처우를 함에 따라 사회가 한걸음 진보했다’ 는 보기좋은 말로 이들이 생존으로서 알려주고 있는 저항을 숨길 수 없다. 우리에게는 책임 떠넘기기 식이 아닌, 당사자들이 배제되지 않는 논의를 거친 대안이 필요하다.
[참고한 기사]
http://petissue.co.kr/news/newsview.php?ncode=179521893747389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498355&code=61121111&cp=nv
https://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771194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84827
글쓴이: 달연
이것저것 해방운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확신이 없어 자기소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밴드 낯선무화과와 타투 작업을 겸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