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비건으로 살다 보면 “식물은 안 불쌍하냐” 같은 질문을 종종 듣는다. “그렇게 동물이 중요하다면서 곤충권은 왜 안 챙겨주냐” 같은 소리도 실제로 아주 가끔 듣는다. 여러 번 듣다 보면 이제는 이런 말들이 그저 비건 혐오를 목적으로 하는, 상당히 일차원적인 비아냥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냥 웃고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말로 심각하게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벌레도 동물인데 정말 그들에겐 권리가 없나? 인간이 이렇게 막 죽여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해충이니까 죽이고 익충이니까 살리는 게 왜 당연한 거지?”
나는 원인 모를 벌레 공포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다. 벌레가 너무 무서우니까, 일단 발견하면 내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윙윙 모기 소리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여름에는 전기 모기채 없이 살 수 없었고, 집 안에서 바퀴를 보면 친구나 가족의 손을 빌려 죽여야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해충이고 익충이고, 벌레를 발견하면 죽여서 없애는 것 외의 선택지는 아예 없는 것인 줄 알고 살아왔다. 일단 모기 바퀴는 해충이라니까 어떻게든 없앴는데, 이와중에 그리마는 익충이라니까 그냥 살게 두기도 했다. 그런데 해충 익충이 뭔지, 죽일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이 정확히 있었나?
우선 우리나라의 농촌진흥청 국가농업기술포털 <농사로>에서는 해충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넓은 의미로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 가치를 두고 인간과 경쟁하는 동물로서,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나 지리적 차이에 따라서 변동할 수 있는 인위적 개념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국내, 해외 상관없이 대부분의 기관에서 해충을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보통 해충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일단 싸그리 죽이고 보는 “방제”다. 어렸을 때는 우스갯소리로 모기나 바퀴가 왜 있느냐는 질문에 방역 업체랑 살충제 제조사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라고 답하고 킬킬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인간중심주의적인 발상이었다. 자연과 생태계, 수많은 생명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대단한 실행력(파괴력)을 떠올려 본다. 이와중에 익충은 인간에게 이로우니 살려주고 보호해 주는 자비로움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열심히 방제를 하고 익충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해충의 개체수는 늘어나는 반면 익충의 개체수는 줄어들고 있다. 그 이유는 계속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인간이 초래한 서식지 파괴와 환경 오염이다.
정말 벌레의 권리는 없는 걸까, 혐오 발언을 봐도 벌레가 인간 사이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너무나 하찮아서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이들을 “벌레 보듯” 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랜 세월 굳어져 왔다. 최근 많이 쓰이는 “ㅇㅇ충”이라는 문제의 단어는 일단 그 표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이미지의 집단으로 묶어버리는 동시에 경멸의 시선을 마구 쏟아붓는다. 벌레는 하등하고 혐오받아 마땅한 것 정도로 취급받고, 어떤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생존권부터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해를 입힌다는 이유로, 또 직접적으로 입히는 피해가 없더라도 그저 같이 있거나 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셀 수 없는 수의 벌레들이 허무하게도 픽픽 죽는다. 이것이 맞는 현상인지 질문을 던진 지는 오래 되었지만, 가축동물의 권리조차도 보호되지 못하는 지금 세상에서 이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다.
벌레라고 하면 다들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를 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건 바퀴이다. 해충 이야기로 넘어오고 나니 바퀴 얘기를 떼 놓을 수 없겠다.
<이어서>
철종
임금님 아닙니다. “철종”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음. 벌레 공포증이 있는 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