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의 부작용이 캐나다 이민이면 괜찮잖아?
조금 많이 묵힌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한다.
나는 세계가 조금 이상한, 그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전,
모두가 마음 편하게 밥을 먹고 웃고 떠들 수 있던 그 때 미국에서 홀로 산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뉴욕은 나의 꿈의 도시였다.
화려하고 멋진 뉴욕의 거리를 나 홀로 자유롭게 돌아다녀 보는 것.
어떤 분들에게는 소소해 보일 수 있고 또 다른 분들에게는 무모해볼 수도 있는 목표를 나는 대학교 졸업 전에 이루게 되었다.
사실 그리 대단한 스토리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미국 뉴욕에서의 짧았던 생활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잘하는 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때 가장 나다워지고 열정적일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일단, 미국 뉴욕에 인턴으로서 살게 된 스토리를 하기 이전에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나를 한마디로 정의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집순이'라는 것이다.
특히, 나를 아는 주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네가?"라고 할 정도로 나는 꽤 열심히 활동을 하는'집순이'에 속한다.
15살, 중2병이 심각했던 시절,
당시에는 '중2병'이라는 용어도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도대체 나의 마음과 생각이 왜 이리 변덕스러울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때도 친구들과 노는 것 대신 집에서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것을 좋아했고,
공부할 때도 학원, 도서관, 독서실을 가는 것 대신에 거실에 있는 탁자에서 했을 정도로
나의 주 바운더리는 집안 그중에서도 TV가 있는 거실이었다.
그만큼 나는 집순이 었고 동시에 심각한 TV덕후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나는 가족을 이끌고 캐나다를 가게 되었다.
사실 시작은 더 과거로 거슬러가야 한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여느 때처럼 TV를 보게 된다.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프로그램의 내용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다양한 국가의 고등학교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거기서 나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아직 초등학생밖에 안되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걱정한 것도 사실 웃기지만,
난 한국의 학교 생활에 대한 반감을 아주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방 속에서 나온 아일랜드, 핀란드의 중, 고등학교 생활을 나에게는 너무나 신선하고 꿈에 그리던 생활로 다가왔다.
사실 일찍부터 나는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홀로 많이 접하며
막연한 해외 학교 생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실제 해외의 학교 생활을 본 이후에는 그 환상이 확신이 되면서 혼자 결심하게 된다.
그래. 나는 해외에서 학교를 다녀야겠다.
그렇게 나는 거실 작은 소파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넓은 세계에 대한 목표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초등학생 6학년이 스스로 해외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당시에 크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내가 원하는 것, 목표로 한 것이 생길 때 갑자기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가 생기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활발하지 않아 정보를 찾기도 제한적이었다.
지금은 유튜브만 봐도 해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볼 수 있고,
어떻게 가는지 정확한 경로를 잘 파악할 수 있으나 2000년대 중반 당시에는 다소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미국 유학에 관한 책을 읽었고 인터넷 서칭을 통해
유학원에 대한 정보를 찾게 된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손을 끌고 가서 유학원 설명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서 알게 된 미국의 '교환학생'제도!
미국에서 전 세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교류 프로그램으로 세계 각국의 중고등학생들이 미국 가정에서 지내며 공립학교에서 한 학기 또는 1년을 정규수업을 듣는 프로그램이다.
이미 나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학생들을 너무나도 많았고,
그들의 좌절과 성공 스토리, 한국 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무궁무진하고 버라이어티 한 이야기는 단번에 나를 사로잡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모님들이 지지하기에는 나는 너무도 어려웠고
나이와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교환학생을 가지 못했다.
친구 따라갔다가 오디션에 대신 붙은 많은 연예인들의 일화.
이것을 내가 겪을 줄이야...
비슷한 맥락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와 함께 프로그램을 억지로 들으러 갔던 3살 터울의 오빠가 나 대신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된 것이다.
오빠의 나이는 당시 16살이었고 가장 교환학생을 많이 보내는 시기라고 했었다.
또한 부모님은 오빠가 남자라는 이유로 어리고 작은 여자아이보다는 믿음을 더 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간 인천 공항에서 홀로 캐리어를 끌고 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었다. 당시에는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또 부럽기만 했다.
그러나, 사실 오빠 또한 아직 어렸고 미숙했기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본인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 학교에서의 생존기는 더더욱 어려웠었다.
그렇게 부러움 반 억울함 반 1년 동안 나는 한국에서, 오빠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다. 오빠는 1년 후 외국에서 돌아왔고, 하루 종일 영어만 쓰고 해외 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얼마나 잘 나갔는지를 자랑하며 떠들어댔다.
그 모습을 보며 중학생이 된 나는 또다시 결심하게 된다.
오빠가 가면 나도 반드시 간다.
원래 나의 목표를 절대 잊지 않고 나 또한 오빠처럼 성공적으로 해낼 것이다.
그러나, 해외에 가고 싶은 생각만 있었지 영어 공부조차 하지 않았던 열정 많지만 게으른 집순이 었던 나에게는 몇 가지의 과제가 존재했다.
첫 번째, 영어. (오빠는 가기 전부터 영어를 꽤 하는 편이었다.)
두 번째, 금전적 문제 (오빠의 유학과 아빠의 이직 등으로 인해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었다.)
세 번째, 어떻게? (교환학생에 대한 오빠의 부정적 평가도 들었고 나의 목표는 해외에서 오래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1년의 교환학생 말고 다른 선택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해외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나는 또 한 번 방법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 겨울, 나는 혼자가 아닌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