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것도 있더라.
'수능'은 어렸을 적부터 나에게는 막연한 공포였다.
마치 시험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 속에서 아직 어린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특히, 중학교 때부터 입시에 다들 목을 매며 수능을 준비하는 것은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사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내가 캐나다를 가게 된 계기는 수능에서 출발한다.
꽤나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초-유년시절을 거치고 교육열이 센 서울의 어느 지역의 중학생이 된 나는 입시의 굴레에 일찍 빠지게 된다.
학교 끝나고 집에서 TV를 보거나 친구들과 함께 만화책을 읽는 대신 학원으로 향했다.
복습은 당연했고 예습 또한 당연한 분위기 속에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끝나고 또 공부를 하는 그러한 무한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삶을 어린 나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소설, 영화,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었고 혼자 이것저것 망상하는 것을 즐겼던 탓인지
넓은 세상을 탐구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일찍 생겨버린 나는 수능을 위한 공부를 피하기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에 돌아와 총 2번의 수능을 보게 되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결과가 더 큰 후폭풍이 되어 날아온 격이었다.
수능을 2번이나 보게 된 것은 일단 캐나다로 이민을 간 내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15살의 나이에 호기롭게 가족 모두를 캐나다로 이끌었고 캐나다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대로 졸업까지 해서 정착할 계획을 세웠었다.
물론, 고등학교 졸업 후에 내가 그토록 바라던 미국에 갈 계획 또한 남몰래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절대 뜻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취업비자 후 받기로 했던 영주권이 무산되자 비자 만료 후 우리 가족은 짧은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당시, 오빠는 고등학교 졸업 후 캐나다의 유명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12학년으로, 한국으로 치면 고3 대입 준비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민자가 아닌 신분으로는 높은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빠와 나 모두 다시 한국의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18살 여름, 갑작스럽게 한국 그리고 예전 나의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10살 때 떠난 이후 8년 만에 다시 살게 된 부산이었다.
입시 지옥을 피해 중학생의 신분으로 캐나다로 떠났으나 수능을 곧 앞둔 고2의 신분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처음 한국 고등학교에 다시 진학하기 위해 학교를 알아봤을 때,
모든 선생님 및 교직원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캐나다의 교육과정과 한국 교육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바로 고2 2학기로 올라가서 수업을 듣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이 때문에 한 학년을 낮춰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반제안 반강요였다.
소위 말해 한 학년을 꿇어야 한다는 것.
당시에는 남들보다 느리게 그리고 다르게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캐나다 학교에서 영어 한 마디 못한 내가 나중에는 우수한 성적을 받는 학생으로 살아남았는데,
말이 잘 통하는 한국에서는 못 살아남을까?
그러나, 역시 한국은 한국 학교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첫날부터 쏟아지는 두꺼운 교과서들과 영어 빼고는 하나도 따라갈 수 없던 교과 과목들.
심지어 매일 2시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던 생활에서 4-5시는 기본이고 밤늦게까지 야자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학교 생활까지,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었던가.
물론, 난 피하고 싶던 입시 생활을 즐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발견했던 나의 다양한 페르소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좌절하지 않고 나만의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게 된다.
캐나다에서 약 1년간 연기 수업을 들었고 실제로 연극 또는 영화 전공으로 캐나다, 미국의 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준비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한국의 고등학교 2학년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내가 찾아낸 돌파구는 바로 이 '연기'였다.
한국에 돌아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캐나다 때처럼 내가 하고 싶은 진로 방향을 그대로 추진해나갔다.
이미 동급생들과 동일한 수준의 공부를 따라잡기에는 나에게는 큰 공백기가 있었고 나 또한 굳이 그 공백기를 따로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물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도 공부는 여전히 놓을 수 없었다.
정시에서는 수능 성적, 수시에서는 내신 성적을 반영하기 때문에 난 여전히 약 3년간의 교과과정을 따라잡아야 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연기학원 연습실에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입시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2학년까지의 교과목을 복습하기 위해 지난 교과서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필기 노트까지 빌려 모든 것을 적고 달달 외웠다.
그리고 수업 후 야자 대신 연기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매일을 연습했다.
캐나다에서 보낼 것이라 생각했던 고등학교의 끝자락을 예상치 못하게 한국에서 하게 되었지만,
좌절할 틈도 없이 견뎌내야 했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결국, 난 피하고 싶었던 한국 고등학교의 입시 생활을 보냈고 수능 또한 치러야만 했다.
그것도 2번이나.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한 만큼의 보상심리가 있었을까.
나는 자꾸 더 높고, 뭔가 더 대단한 곳을 가야 인정받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에 이루지 못했고, 원하지 않던 대학에 진학을 한 후 적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학교 탓이라 생각했지만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그저 참기만 했던 마음속 무언가가 터져버린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결국 한학기도 다니지 못하고 병가 휴학을 내고 다시 수능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로 입학을 했고,
그럭저럭, 아니 사실 꽤 잘 적응해나갔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높은 성적을 유지했었고 동시에 '스펙 쌓기'를 위한 여러 대외활동을 했었다.
또한 공강과 주말을 이용해서 아르바이트 또한 꾸준히 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었다.
그러나, 사실 큰 목표는 없었던 것 같다.
성취욕과 경쟁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이것저것 활동을 했지만 무언가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가 그리도 원했던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이번에는 나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