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사람인(人)'은 사람의 측면 모습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라고 하지만, 나는 그 글자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마치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사랑해 줄 존재, 자신이 의지할 존재가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열네 살 아랍 소년 모모와 늙고 병든 유태인 로자 아줌마가 서로에게 기대어 퍽퍽한 생을 견뎌낸 이야기이다. 남들에게는 있는 부모가 모모에게는 없다. 모모는 아빠의 얼굴 역시 본 적 없지만, 자신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속상하다. 자신의 진짜 나이가 몇 살인지,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모른 채 프랑스 빈민가 뒷골목에 자리한 낡은 건물의 7층에서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산다. 아줌마가 돌보는 아이들은 모모 말고도 여러 명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그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모모는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자기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다고 말하며 폭풍 눈물을 흘린다.
슬퍼하는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는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준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나무에 묶어두고 바캉스를 떠나는 가족들도 많고, 해마다 그런 식으로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죽어가는 개가 삼천 마리씩이나 된다는 것"도 언급한다. 그녀에게는 모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고 몇 번이나 맹세한다. 하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받는 우편환 생각이 다시 나서 울며 방을 뛰쳐나간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슬픔에 잠긴 모모가 양탄자 행상을 하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자 주제이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모모의 질문에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모모가 대답을 재촉하자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라며 답을 회피한다. 하지만 모모가 계속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그렇단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모모도 알고 있었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병원에서 첫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때가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힘들었던 산고를 단숨에 잊게 만드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퉁퉁 붓고 쭈글쭈글한 얼굴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작고 여린 아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게 힘과 지혜를 달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신생아는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른 포유류들은 태어난 지 채 5분도 안 되어 비틀비틀 엉덩방아 몇 번 찧다가 걷는데 비해 인간은 꼬박 1년을 기다려야 겨우 한 걸음씩 발을 뗄 만큼 자생력이 약하다. 자신을 돌봐줄 존재가 간절하다. 엄마가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기대로 일부러 짓궂은 행동을 하고, 말썽도 피우지만 모모는 끝내 엄마를 만나지 못한다. 그리워했던 엄마는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고, 자기를 데리러 온 아빠마저 계단에서 굴러 죽어 버린다. 모모에게는 이제 정말 로자 아줌마 밖에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다. 그 작품에서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을 서로를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과 누구나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 그리고 서로를 지탱해 주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로맹가리가 <자기 앞의 생>에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동일했다. 사람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이라도 있다면희망의 끈을 붙잡고 '자기 앞의 생'을 끝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이는 로맹가리 (에밀 아자르) 작품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된 주제이기도 하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 수용소 기억을 트라우마로 안고 산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더라도 절대 병원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모모에게 신신당부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모가 취한 행동은 평소 그녀가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내려가 숨곤 했던 지하실('유태인 동굴'이라 명명한 곳)로 그녀를 옮기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돌본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그녀 곁에서 3주를 더 머문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기가 막힌 스토리다. 하지만 모모의 입장이라면, 로자 아줌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모라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이 로자 아줌마뿐인 모모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파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모모는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를 잃었지만 여전히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억으로 자기 앞의 남은 생 역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사랑해야 한다."라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 사랑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고독해져 가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독거노인이 돌아가신 지 몇 주 만에 이웃의 신고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오는가 하면, 고립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극단적 선택 소식도 끊이질 않는다. 사회가 개인화, 파편화되어 가면서 점점 가족 간의 결속이나 공동체의 소속감이 느슨해졌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를뿐더러 타인의 사생활을 묻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분위기다. 익명 사회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반면, 소외된 개인의 외로움은 증폭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했던 질문을 우리 사회도 던져야 할 것만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는지를.